| 한자 | 革新 議會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길림성 길림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 단체 |
|---|---|
| 설립자 | 김상덕|김승학|김좌진|황학수 등 |
| 설립 시기/일시 | 1928년 12월 |
| 해체 시기/일시 | 1929년 5월 1일 |
| 최초 설립지 | 길림성 길림시 |
1928년 중국길림에서 민족 유일당을 조직하기 위해 추진된 과도기적 임시 기관.
1926년 북경(北京)에 이어 만주 지역에서도 민족 유일당(民族唯一黨) 운동이 제기되었으나 실패하게 된다. 이에 정의부(正義府)는 신민부(新民府)와 참의부(參議府) 3부 통합을 추진하여 1928년 7월 3부 통합을 제의하였으나 실패한다. 이러한 가운데 1928년 12월 하순 길림에서 신민부와 참의부가 각 단체의 명의를 취소하고, 여기에 정의부 탈퇴파를 합쳐 임시기관으로서 혁신 의회를 조직하였다. 혁신 의회는 1년을 기한으로 하는 과도기적인 단체로서 1년 후에는 군정부를 성립시킬 계획이었다.
혁신 의회에서는 자신들의 통치구역을 잠정적으로 설정하기 위하여 남일구(南一區)·중일구(中一區)·북일구(北一區) 등 3구역으로 크게 나누었다. 남일구는 참의부의 관할구역, 중일구는 정의부에서 탈퇴한 김동삼·지청천 등의 관할 구역, 북일구는 신민부의 관할 구역이었다. 이 같은 혁신 의회의 행정 구역은 잠정적인 것으로 1년 후에 조직될 군정부를 위한 터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한편 혁신 의회는 1929년 5월 이전에 군정부를 조직하기 위하여 민족 유일당 재만 책진회를 결성 하였다. 그러나 1929년 초 길림 지방에서는 정의부가 신민부와 참의부의 잔여세력을 규합하여 동년 4월 1일에는 국민부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1929년 5월 1일까지 군정부를 세우지 못한 혁신 의회는 자연 해체되고 유일 독립당 재만 책진회 역시 해체되고 말았다.
1928년 7월 정의부(正義府)는 신민부(新民府)와 참의부(參議府)에 3부 통합을 제의하였으나 실패한다. 이러한 가운데 1928년 12월 하순 길림에서 신민부와 참의부가 각 단체의 명의를 취소하고, 여기에 정의부 탈퇴파를 합쳐 임시기관으로서 혁신 의회를 조직하였다.
혁신 의회에는 김동삼(金東三) 계열인 김상덕(金尙德)·김원식(金元植), 참의부 참의장인 김승학(金承學), 김소하(金筱夏), 신민부 군정파인 중앙 집행 위원장인 김좌진(金佐鎭)과 황학수(黃學秀)·김시야(金時野)·최호(崔灝)·정신(鄭信) 등이 가담하였다. 또한 재중국 한인 청년 동맹(在中國韓人靑年同盟)도 여기에 참여하였다.
혁신 의회 의장에 김동삼, 중앙 집행 위원장에 김원식이 각각 임명되었으며, 위원으로는 김승학·황학수·정신·지청천(池靑天) 등 16명이 선임되었다. 그리고 군사위원장은 황학수, 위원은 지청천, 민정위원장은 김승학이 각각 담당하였다. 이 같은 구성원들로 조직된 혁신 의회는 1년을 기한으로 하는 과도기적인 단체로서 1년 후에는 이 단체를 바탕으로 하여 군정부를 성립시킬 계획이었다. 이와 같이 혁신 의회는 1929년 5월 이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야 했기 때문에, 유일 독립당 재만 책진회를 결성한다. 그런데 1929년 초 길림 지방에서는 정의부가 신민부와 참의부의 잔여세력을 규합하여 동년 4월 1일에는 국민부를 탄생시켰다.
이러한 가운데 혁신 의회는 1929년 5월 1일 만기가 되어 자연 해체되고 유일 독립당 재만 책진회만 남게 되었다. 따라서 혁신 의회 참여자들은 각자의 근거지로 이동하여 군정부를 조직하고자 하였다. 즉 김좌진 등은 신민부의 근거지였던 북만주 지역으로, 지청천은 오상현(五常縣)에서 근거지를 확보하고자 하였으며, 김승학은 남만주로 돌아갔다. 그 결과 민족 유일당 재만 책진회(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 역시 해체되고 말았다.
혁신 의회는 민족 유일당을 성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혁신 의회는 그 실현을 위하여 민족 유일당 재만 책진회를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중앙 집행 위원장에 김동삼, 위원에 김좌진·전성호(全盛鎬) 등을 선출하였다.
1925년 일제는 동북 군벌 정권과 미쓰야협정(三矢協定)을 맺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였고, 1927년경에는 일본 영사관 경찰과 밀정을 동원하여 독립운동계의 재편성을 방해하였으며, 조선총독부의 경찰까지 만주 지역에 파견하여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려고 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혁신 의회는 친일파 숙청에 주력하여 1929년 5월 해체될 때까지 선민부(鮮民府)와 한교 동향회(韓僑同鄕會) 등 일제 부용기관 파괴에 진력하였다.
혁신 의회는 중국 지방에서 합법적인 자치기관을 조직하고자 하였다. 만주 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던 독립운동은 재만 한인사회에 그 바탕을 두었던 것으로, 정의부·참의부·신민부 등 3단체도 역시 재만 한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조직되었다. 그러므로 이곳을 근거로 하여 지방자치제를 활성화하고, 자치기관을 조직하는 것은 독립운동을 전개하는데 효과적인 한 방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