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구촌 농민 감조 감식 투쟁

한자 海溝村 農民 減租 減食 鬪爭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흑룡강성 하얼빈시 아성구 해구촌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농민 투쟁
관련인물/단체 이극화|중국 공산당
발생|시작 시기/일시 1930년 3월 31일
종결 시기/일시 1930년 3월 31일
발생|시작 장소 하얼빈시 아성구 해구촌
종결 장소 하얼빈시 아성구 해구촌
정의

1930년 3월 하얼빈시해구촌의 조선 농민들이 조선인 지주의 가혹한 수탈에 대항하여 벌인 투쟁.

개설

1929년 말 하얼빈시해구촌에는 비교적 많은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한인(漢人) 지주 우지합 등의 토지에서 소작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조선인 소작농들은 지주들에게 최소 수입의 절반 이상을 소작료로 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도 1930년에 이르러 지주들은 소작료를 더 높이고자 하였다.

이에 해구촌의 조선인들은 해구 농민 조합을 조직하고, 1930년 3월 31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해구 농민 조합에서는 대표를 파견하여 지주들에게 소작료를 올리지 말 것을 요구하였으나, 지주들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양측 간에 충돌이 발생하였고, 아성현(阿城縣)의 경찰이 출동하여 지도자 12명을 체포하였다.

그러자 이극화는 407명의 농민들을 모아 지주 우지합의 집과 아성현 정부를 포위하고 시위를 벌였다. 이에 놀란 지주와 현(縣)정부는 체포했던 대표들을 석방하고, 소작료를 낮추는데 합의하였다.

역사적 배경

1929년 말 아성현의 해구, 옥천, 취원창(聚源昶), 사리둔, 모서하 등 19개 촌에 조선인이 약 1,436호가 살고 있었다. 그 중 비교적 많은 조선인들이 살고 있었던 해구촌에서에는 중국 공산당 북만 특별 위원회 위원 이극화가 있었다. 이 해구촌에서 조선인들은 한인(漢人) 지주 우지합 등의 토지에서 소작을 하면서 생활하였다.

당시 평균작일 경우 1㏊ 당 10섬(약 70원)의 수입이 있었다. 그런데 소작료를 가을에 현물로 낼 경우에는 봄에 빌린 종자 값과 논갈이 값을 낸 후, 벼의 절반을 내야했다. 그리고 현금으로 낼 경우 봄에 내면 약 30~40원 가량을 내야하고, 가을에 내면 이자가 붙어 50~60원 정도를 내야했다. 최소 수입의 절반 이상을 내야 하는 어려움 속에서 살고 있던 조선인들에게 한인 지주들은 소작료를 더 높이려고 하였다.

경과

이에 해구촌의 조선인들은 해구 농민 조합을 조직하고, 1930년 3월 31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해구 농민 조합에서는 조선 농민들에게 먼저 소작료를 내지 말라고 하고, 대표를 파견하여 지주들에게 소작료를 올리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지주들은 소작료를 내지 않는 것을 이유로 토지를 회수하겠다고 하면서, 실제로 토지를 회수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양측 간에 충돌이 발생하였고, 지주측 인원들이 쫓겨나게 되었다. 그러자 아성현의 경찰이 출동하여 조선 농민들의 지도자 역할을 한 최재구, 정대일, 황병목, 이승전, 유홍민 등을 12명을 체포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이극화는 각 지역에 연락하여 407명의 농민들을 모아 아성현으로 진입하였다. 그리고 지주 우지합의 집과 아성현 정부를 포위하고 시위를 벌였다. 경찰이 이들을 해산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고, 농민들이 현정부의 정문을 부수었다.

결과

농민들의 투쟁에 놀란 현(縣)정부와 지주들은 체포했던 대표들을 석방하고 소작료를 낮추는데 합의하였다.

의의와 평가

가혹한 수탈 끝에 소작료 낮추기에 성공한 이 농민 투쟁은 하얼빈시 조선인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참고문헌
  • 서명훈, 『하얼빈시 조선 민족 백년 사화』,(민족 출판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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