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赤衛隊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이통현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항일 유격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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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립자 | 이홍광|중국 공산당 반석 중심현 위원회 |
| 설립 시기/일시 | 1931년 10월 |
| 개칭 시기/일시 | 1932년 6월 |
| 개칭 시기/일시 | 1932년 6월 4일 |
| 최초 설립지 | 길림성 이통현 |
1931년 10월경 길림성(吉林省) 이통현(伊通縣)에서 한인 이홍광(李紅光)이 주동이 되어 조직한 항일 유격대.
중국 공산당 반석 중심현 위원회(磐石 中心縣 委員會; 서기 全光, 본명 吳成崙, 韓人)에서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조직한 적위대는 남만주 지역에서 중국 공산당이 영도하는 최초의 무장 조직이었다. 1932년 2월 개최된 중국 공산당 반석현 위원회 확대 회의에서는 적위대를 토대로 ‘반석 항일 유격대’를 조직한다는 방침에 따라 대장은 이홍광, 양군무는 정치위원의 직책을 맡았다.
이후 적위대는 1932년 6월 4일 반석 공농 반일 의용군(磐石 工農 反日 義勇軍; 약칭 반석 의용군, 반석 유격대), 동북 인민 혁명군 제1군 독립사, 동북 항일 연군 제1군 등으로 발전하면서 1930년대 중국 동북 지방 항일 무장 투쟁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적위대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의 중국동북(만주) 침략에 항거하고 일제의 앞잡이를 응징하고자 결성되었다.
중국 공산당 반석중심현 위원회는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무장조직의 결성을 모색하였다. 이 과정에서 역량 있는 활동가로 지목되던 이홍광 등 7명의 한인(韓人) 청년들을 토대로 적위대가 결성되었고, 대중들은 일제의 앞잡이를 숙청하는 부대라고 해서 ‘개잡이 부대(打狗隊)’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는 적위대를 대중의 기초 위에서 발전시키기 위해 양군무(楊君武; 일명 楊左靑, 漢族) 등을 반석에 파견하여 남만지역에서 항일유격대를 건립하고자 하였다. 특히 1932년 2월 개최된 중국 공산당 반석현 위원회 확대회의에서는 적위대를 토대로 ‘반석 항일 유격대’를 조직한다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적위대는 1932년 6월 4일 ‘반석 공농 반일 의용군’로 발전하였다. 나아가 한·중 양민족의 연합부대적 성격을 띠는 동북 인민 혁명군 제1군 독립사, 동북 항일 연군 제1군 등으로 발전하였다.
적위대는 이홍광 등 7명의 한인(韓人) 청년들을 토대로 결성되었다. 창건 당시 적위대의 무장은 소총 한자루와 권총 5정, 수류탄 2발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 작은 조직은 한인 밀정 등 일제의 하수인과 친일 한인들의 조직인 조선 인민회(保民會) 및 만주국 관헌, 일본 군경, 악덕 지주 등과의 투쟁에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특히 대중들은 일제의 주구를 숙청하는 부대라고 해서 ‘개잡이 부대(打狗隊)’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러한 적위대의 활동에 따라 반석 일대에서는 1932년 초부터 중국 공산당과 연계된 각종 농민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적위대는 1931년 말의 추수 투쟁과 이듬해 봄의 춘황 투쟁(春荒 鬪爭, 쌀 빼앗기 투쟁) 등의 대중 운동을 주도하며 반석 일대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반봉건(계급) 투쟁 및 항일투쟁의 성격을 띠는 이러한 대중운동을 통해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의 역량을 증대시키는데 기여하였다. 같은 해 5월에 만주국 군대 출신 중국인 병사들이 합류하면서 적위대는 30여 명 규모로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