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서동 학살 사건

한자 鶴栖洞 虐殺 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삼합진 학서동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학살 사건
관련인물/단체 야마나베/일본군 보병 74연대 회령 수비대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0년 10월 23일
종결 시기/일시 1920년 10월 23일
발생|시작 장소 중국 길림성 용정시 삼합진 학서동(초평촌)
종결 장소 중국 길림성 용정시 삼합진 학서동(초평촌)
정의

1920년 10월 일본군 회령 수비대가 용정시의 학서동(鶴栖洞)에서 김희구 등 10여 명을 학살하고, 최구칠의 집을 방화한 사건.

개설

학서동은 일명 초평촌(草坪村)이라고도 하는데, 용정시 삼합진 소속으로 진소재지에서 서남으로 두만강을 거슬러 5.5㎞되는 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학서동은 청나라 광서(光緖) 말년에 세워졌는데, 전하는 말에 따르면 매년 봄과 가을에 백학이 이곳에서 쉬고 간다고 하여 학서동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1920년 10년 23일에 일보군 보병 제74연대야마나베(山邊) 중위가 거느린 회령수비대가 학서동을 토벌할 때 일본군에 저항하였다는 이유로 김희구(金希久), 김도현, 허진세, 오여옥, 허주경, 정병락, 김군화, 정중포, 최문칠, 유경화 등 10여 명을 사살하였고, ‘불령선인’을 재워줬다는 이유로 최문칠(崔文七)의 집 또한 소각하였다.

역사적 배경

1920년 6월 북간도의 봉오동(鳳梧洞)에서 패배한 일제의 조선군(朝鮮軍)은 서북간도지역에 있는 독립군들을 소멸시키기 위해 「간도 지방 불령 선인 초토 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세웠다. 일제는 이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만주의 마적단을 매수하여 1920년 10월 2일 혼춘현(琿春縣)의 일본 영사관을 공격토록 하였다.

일제는 영사관을 습격한 마적단에는 한국 독립군·중국군·러시아인이 혼합되어 있는 단체라고 주장하였다. 중국군이 있었다는 것을 주장한 것은 간도지역이 중국 땅이기 때문이었고, 러시아인을 주장한 것은 러시아가 간섭하지 못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한국 독립군을 주장한 것은 그들의 침략 목적이 한국 독립군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침략의 구실을 만든 일제는 혼춘 일본영사관 습격이 있었던 그날 즉시 조선군 제 병력을 간도지방으로 침입시켰다. 먼저 남쪽에서는 조선군 제 19사단과 제 20사단의 78연대 소속의 3대대, 헌병대 및 경관대의 연합 부대를, 동쪽에서는 이전부터 시베리아에 주둔해 있던 포조(浦潮)파견군 제 14사단 및 제 11사단의 토문자(土門子)지대, 제 13사단의 우입(羽入)지대를 침입시켰다. 북쪽에서는 북만주에 파견돼있던 안서(安西)지대로 그 구성은 3개 보병중대 및 4개의 기관총대, 1개 기병소대였다. 마지막으로 서쪽으로는 1919년 4월 도독부(都督府)가 폐지되고 사령부가 설치되어 주둔하게된 관동군 제 19연대의 1개 대대 및 기병 제 20연대가 침입하였다.

경과

1920년 10년 23일에 일보군 보병 제74연대 야마나베(山邊) 중위가 거느린 회령수비대가 학서동을 토벌할 때 일본군에 저항하였다는 이유로 김희구(金希久), 김도현, 허진세, 오여옥, 허주경, 정병락, 김군화, 정중포, 최문칠, 유경화 등 10여 명을 사살하였고, ‘불령선인’을 재워줬다는 이유로 최문칠(崔文七)의 집 또한 소각하였다.

결과

김희구(金希久), 김도현, 허진세, 오여옥, 허주경, 정병락, 김군화, 정중포, 최문칠, 유경화 등 10여 명을 사살하였고, ‘불령 선인’을 재워줬다는 이유로 최문칠(崔文七)의 집 또한 소각하였다.

참고문헌
  •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편집위원회,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1)』민족출판사, 1999
  • 김철수, 『연변 항일 사적지 연구』(연변인민출판사, 2002)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사전』(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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