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얼빈 조선인회

한자 哈爾濱 朝鮮人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흑룡강성 하얼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조선민족 민간 단체
설립자 하얼빈시 인민 정부 민정국
설립 시기/일시 1948년 4월 23일
해체 시기/일시 1958년 5월
최초 설립지 흑룡강성 하얼빈시 중앙대가 3호(민주일보사 강당)
정의

1948년에 설립되어 흑룡강성 하얼빈시 인민 정부 민정국의 직접 관리를 받던 조선 민족 민간 단체.

개설

하얼빈에서 지하 활동을 하던 조선 독립 동맹 북만 특별 위원회는 1945년 8월 17일부터 공식적으로 활동하게 된다. 1946년 7월 20일에는 조선 독립 동맹을 북만 지구 조선인 민주 연맹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주덕해와 정경호가 주요 간부로 참여하였다. 국공내전에 따라 조선 의용군 제3지대도 전쟁에 참여하였고, 민주 연맹과 조선 인민 공작대도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1948년 하얼빈 시내에는 조선인이 728호, 3,037명이 거주하였다. 당시 하얼빈 정부에서는 조선 민족에 대한 사상 작업을 강화하고, 정치, 경제, 문화 등을 보호 발전하기 위하여 인민 공작대와 민주 연맹을 기반으로 하얼빈시 조선인회를 건립할 것을 결정하였다.

1948년 4월 23일 중앙대가(中央大街) 3호에 있는 민주일보사 강당에서 민주 연맹 각급 대표와 공작대원들이 참가한 대회를 열고 민주 연맹의 해산과 조선인회의 성립을 선포하였다. 이 회의에서 조선인회 조직과 정관을 통과하였고, 집행위원을 뽑는 선거를 실시하였다. 조선인회의 정관은 6장 14조로 이루어졌으며, 회장에 김문기, 부회장에 이석룡, 비서에 송우섭, 복리부장에 지황석, 총무부장에 최인국, 청년부장에 서재수, 부녀부장에 김복록 등 15명의 집행위원을 선출하였다.

조선인회는 1948년부터 1958년 해산 될 때까지 10여 년 동안 하얼빈시 정부를 도와 조선민족의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위생 등의 발전과 민족단결을 위하여 큰 기여를 하였다.

설립 목적

정관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중국 공산당과 인민 정부를 옹호한다. 조선인의 상공업을 발전시키고, 취업 문제를 해결하여 군중의 생활을 안전하게 한다.

(2) 분회 조직 생활을 강화하여 당과 정부의 정책 법력을 관철하며, 애국주의, 국제주의 교육을 진행하여 군중의 사회주의 각오를 제고 시킨다

(3) 군중들의 정치 문화와 형세, 임무에 대한 학습을 조직하고 실제 행동으로 전선을 지원하도록 한다.

(4) 당의 민족정책을 적극 선전하여 민족 내부와 각 민족지간의 단결을 공고히 한다.

(5) 군중을 동원하여 사회주의 조국 건설에 적극 참가하도록 하며 기여하도록 한다.

(6) 각종 문화, 체육 활동을 조직하여 군중의 문화 생활을 풍부히 한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조선인회는 1948년부터 문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문화 활동을 통하여 매년 5월 1일 국제노동절, 10월 1일 국경절, 또는 설명절에 조선 문화회관에서 화극, 가무, 곡예 등의 공연을 펼쳤다. 그리고 평소에는 사고무만회를 조직하여 한인[조선족]들의 문화 생활을 풍부하게 하였다.

조선인회는 1949년 9월 3일 송강성 제1차 조선족 축구대회를 주최하였다. 그 때부터 매년 조선족전통운동회를 열고 축구와 씨름, 그네뛰기, 널뛰기 등의 경기를 진행하였다. 이런 운동 대회를 통하여 한인[조선족]은 체력을 증강시키고, 민족의 전통을 이어갔으며, 민족 내부의 단결을 촉진하였다.

1951년 조선인회는 조선인 실업자의 직장을 해결하여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조선인회 농구공장(1951. 3), 조선인회 진료소(1951. 4. 24), 조선인회 건축회사(1951. 5. 10), 조선인회 소비합작사(1951. 여름), 조선인회 만가 수전 농장(1952. 봄) 등 조선족 기업을 설립하였다.

위와 같은 기업들은 한인[조선족] 실업인원 307명의 취업 문제를 해결해주었고, 생활이 어려운 가정을 도와주어 안정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참고문헌
  • 서명훈, 『하얼빈시 조선 민족 백년 사화』,(민족 출판사, 2007)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