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국민회

한자 朝鮮 國民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청년 단체
설립자 장일환|백세빈
설립 시기/일시 1917년 3월 23일
해체 시기/일시 1918년 2월
최초 설립지 평안남도 평양 신양리
정의

1917년 3월 23일 평양 신양리(新陽里)에서 장일환 등 평양숭실학교(崇實學校) 출신 청년 학생들이 결성한 항일 비밀 결사 조직.

개설

조선 국민회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장일환(張日煥)은 숭실 학교를 졸업한 후 1914년 9월 미주하와이에서 박용만(朴容萬)을 만났다. 장일환은 박용만과 협의를 거쳐 국내에 청년 단체를 조직하고 국내외가 상호 협력하여 국권 회복 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1915년 4월 비밀리에 귀국한 장일환은 1차로 하와이 대한인 국민회원으로 활동하다 앞서 귀국한 강석봉(姜錫奉) 및 서광조(徐光朝)와 접촉하였다. 이어 1915년 겨울 중국안동현[安東縣, 현 단둥(丹東)]에서 활약하고 있던 백세빈(白世彬)을 만나 박용만과 협의된 계획을 전하고 동지로 포섭하였다.

1917년 3월 23일 조직된 조선 국민회의 회원은 일반회원과 준비회원으로 구분되었다. 조직의 운영은 매년 봄에 정기적인 회의를 개최하기로 정하고 조직의 비밀보장을 위해 3 및 숭실 학교가 개교하는 시기를 이용키로 하였다. 조직 운영에 필요한 경비는 각 회원이 각출하는 회비로 충당하며 그 외 별도로 운동자금모집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회원 상호간에 사용할 암호와 비밀문서 작성 요령까지 마련해 두었다.

그러나 목적달성 이전에 조직이 발각됨에 실패하고 말았다. 비록 조선 국민회가 일체측에 의해 발각되어 해산되기는 했으나 그 결사의 조직기반은 잔존하여 3·1 운동 당시 평양 중심의 시위 운동에서 주된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이후 1919년 9월에는 박인관(朴仁寬)이 중심이 되어 대한 국민회(大韓國民會)란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도 하는 등, 회원 각자 독립운동에 헌신·활동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설립 목적

구미 세력의 동양 진출과 더불어 일본이 중국으로의 침략을 본격적으로 진행할 때를 이용하여 자주 독립을 달성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변천

장일환·강석봉·서광조·백세빈은 비밀 결사 조직에 관해 협의하고 일차 계획으로는 우선 운동에 필요한 자금 조달 방법과 운동 근거지를 간도지역에 구축해 장래에 대비한다는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계획을 실천에 옮길 즈음 국내에서 신한 혁명당(新韓革命黨) 관련인사들이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으므로 계획을 잠시 보류하고 회원 각자가 비밀리에 조직 확대 및 동지 규합에 힘쓰면서 조직 기반을 다지는 작업에 주력하기로 노선을 변경하였다.

그리고 1917년 3월 23일 평양 신양리(新陽里)에서 장일환 등 10여 명이 모여 조선국민회를 결성하였다. 조직은 회장에 장일환, 통신겸 서기에 배민수, 안동현백세빈, 경상도·전라도·황해도 구역장으로 오병섭·강석봉·노선경을 각각 임명하였다.

체계적으로 정비된 형태는 아니지만 크게 두 가지 점을 특징으로 들 수 있다. 첫째, 본부격인 평양 지역은 회장이 담당하고 지부적인 성격으로 각지에 구역장을 두어 전국적인 규모의 조직으로 확대 발전시키려고 하였다. 다음으로 내외통신 즉 국내·외의 연락기구 설치에 중점을 두었다. 해외의 독립운동 세력, 즉 하와이 국민회와의 긴밀한 연계를 주요사항으로 했던 것과 아울러 중국간도 지역에의 조직 확대를 의도하였다. 간도 지역에서는 토지 매입 및 근거지 구축 방안도 마련하였다. 이것은 장기적 투쟁을 대비한 기지구축 포석의 일환이었다.

조선 국민회는 1918년 2월경 일제 당국에 발각되어 중국으로 도피한 사람도 있었으나 그 중 25명은 체포되었으며 장일환 등 12명의 중심 인물은 재판에 회부되어 최고 3년형까지 받게 되면서 해산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조선 국민회는 국내에서 조직된 비밀결사이면서도 하와이 대한인 국민회나 하와이 대조선 국민군단과 깊게 관련된 조직으로서 일면 국내 지부적인 성격을 띤다. 실행세칙 중 첫째가 재미 대한인 국민회와의 연락 도모였던 사실과 암호 중 특히 하와이에 대한 암호를 작성하고 있는 점과 박용만이 주필로 활약하고 있는 하와이대한인국민회의 기관지 『국민보(國民報)』의 배포를 중요 활동으로 전개하고 있었던 점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조선국 민회의 구성원은 20~30대 초반이 대부분이고 10대도 4명이나 포함된 독립의식이 확고한 청년들이며 학력은 숭실대학 출신 5명, 숭실대학 재학생 2명, 숭실학교 출신 4명, 숭실학교 재학생 4명 그 외 평양신학교 출신자 1명, 경성연희 전문 학교생 1명, 군산 영명 중학교생 1명 등이다. 회원 대다수가 숭실학교 관련된 인물로 이들이 조직을 이끌어 가는데 주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처럼 조선 국민회는 숭실학교 관련자들이 중심이 되었지만 그 외 평양 신학교, 경성 연희 전문학교, 군산 영명 학교 학생 등도 함께 참여하여 각지 지식청년들을 연합하고자 계획한 면도 참작할만하다.

한편 회원들 중 학교에서 교편을 잡거나 서당 교사로 활동한 이도 적지 않아 일선 교육 현장에서 구국 교육 실현을 통해 민족의식고취에 일익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회원 중에 기독교 장로·교회조사(助事) 등이 있고, 신학교출신과 기독교 계통의 학교인 숭실·영명·연희 전문 학교 관련자들이 중심인 것으로 보아 대다수가 기독교신자였다.

조선 국민회는 이처럼 하와이 대한인 국민회의 기관지 『국민보』의 배포 활동과 함께 교육 현장에서 종사하던 교사들을 통한 민족 교육 활동을 전개하여, 항일 독립정신을 학생 및 일반인들에게 심어 주려고 노력하였다.

조선 국민회원들 중에는 단결의지를 공고히 하면서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의지를 혈서로 써서 맹약하는 이들도 있었다. 배민수·김형직·노덕순 등은 식지(食指)를 잘라 ‘대한독립’이라 혈서하고 어떤 이는 ‘결사(決死)’라고 혈서하기도 하였다.

또한 독립을 향한 의지가 있는 청년을 뽑아 회원으로 가입시켰으며, 이후 이들을 항일 투쟁의 역군으로 육성케 하기 위해 중국 각지의 무관학교에 입학시킬 것을 계획하였다. 군사학교의 입학 추진계획과 아울러 무기 구입 및 군자금 조달을 위한 계획도 별도로 세웠다. 조선 국민회의 중심 인물들은 무기를 구입키 위한 자금 마련의 방안으로 각지의 유지를 물색한 후 회원으로 가입시킨 뒤 그에게 군자금을 출자케 하여 그 자금의 일부로 권총을 구입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 국민회의 활동을 통해 볼 때, 이들이 지향한 운동 전략은 계몽주의적 측면도 나타나지만, 독립군적 성격의 암호를 사용한 점, 무기 구입등 무력 양성 계획을 수립한 점, 독립 전쟁론을 일관한 박용만과 협의해 조직된 청년 단체인 점 등으로 보아 독립 전쟁론적 방략이 주된 흐름이었으며 무력에 의한 항일 투쟁을 목표로 하였다. 또한 조선 국민회가 일체 측에 의해 발각되어 해산되기는 했으나 그 결사의 조직기반은 잔존하여 3·1 운동 당시 평양 중심의 시위 운동에서 주된 역할을 담당하는 등 독립운동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사사전』(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 강영심, 「朝鮮國民會硏究」(『한국독립운동사연구』 3집,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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