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북 사건

한자 通北 事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길림성 통화시 통화현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만주 군벌의 조선인 독립운동 탄압
관련인물/단체 장작림|봉계 군벌|조선 의용군|이종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3년
발생|시작 장소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통화현
정의

1923년 봉계(奉系) 군벌 장작림(張作霖)이 일제와 결탁하여 통화현(通化縣) 통북(通北) 지역의 조선인 독립운동 단체를 탄압한 사건.

개설

1923년 통의부(統義府) 군법국(軍法局) 국장 이종건(李鍾乾)은 의용군 2개 중대를 거느리고 박일초 소대를 진무하기 위하여 통화현 통북에서 두 개의 농가에 나누어 머물렀다. 그런데 이 때 중국 지방군경 40여 명이 쳐들어와 이종건의 의용대를 공격했다. 의용대는 이에 맞서지 않고 퇴각하였다. 그러나 이 와중에 앞집에 있던 김창도와 다른 3명의 대원이 사망하였고, 송봉오는 오른쪽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목갑총 4자루, 장총 4자를 탈취 당하였다.

역사적 배경

1920년 이후 봉계군벌 장작림은 일제와 결탁하여 남만지구에서 활동한 독립운동 단체를 탄압하였다. 장작림은 1910년대부터 일제와 협력 하에 무력을 강화시켜 왔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가 요구하는 만주에서의 불량 선인 단체를 탄압해달라는 일제의 요구를 수용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만약 일본의 요구를 거절할 경우 만주에 일본군이 직접적으로 진주하여 자신의 세력이 축소될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장작림은 일본 군경을 대신하여 직접 조선 독립운동 단체를 탄압한다.

관전(寬甸), 환인(桓仁), 집안(輯安), 흥경(興京), 통화(通化) 등 각 지방에서는 조선 독립운동 단체들이 중국 지방군경의 ‘토벌’을 받아 막대한 손실을 입게 된다.

경과

1923년 통의부 군법국 국장 이종건은 의용군 2개 중대 30여 명을 거느리고 통의부에서 분열 활동을 하는 기원파 전덕원의 부대원인 박일초 소대를 진무하기 위하여 통화현 통북에서 두 개의 농가에 나누어 머물렀다. 박일초 소대는 전덕원의 지시로 통의부의 양기탁, 현정경 등 간부들을 체포하여 구금한 소대였다.

그런데 이 때 중국 지방 군경 40여 명이 쳐들어와 이종건이 지휘하고 있던 의용군 1, 2중대가 머물고 있는 두 집 중 앞집을 공격하였다. 뒤에 있던 대원들이 반격하려고 하자 이종건 국장은 그들을 말렸다. 그것은 중국 군경들과 싸울 수 없고, 만약 싸우게 된다면 마을 농민들에게 큰 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다.

결과

중국 지방 군경을 피해 퇴각하던 중 앞집에 있던 대원들은 중국 지방 군경의 포위를 뚫고 나가다가 김창도와 다른 3명의 대원이 사망하였고, 송봉오는 오른쪽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목갑총 4자루, 장총 4자를 탈취 당하였다.

참고문헌
  • 중국조선민족발자취편집위원회 편, 『중국조선민족발자취총서, 2 : 불씨』(민족출판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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