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中國 共産黨 珠河 中心縣委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흑룡강성 하얼빈시 상지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지역 공산 주의 단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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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립자 |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최동범 |
| 설립 시기/일시 | 1930년대 |
| 최초 설립지 | 빈강성 주하현 |
1930년대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 소속으로 주하현의 반일 투쟁을 주도한 조직.
1930년 9월 주하현 특별 지부 위원회는 김백파(金佰波), 정춘만(鄭春萬)을 책임자로 하였고, 1930년 10월에는 전해선(全海善)이 서기, 장세훈(張世勛)이 조직위원, 정춘만이 선전위원으로 각기 활동하였다. 이 때 주하현위 산하에 이영철(李永哲)을 서기로 하는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주하현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에서는 1931년 12월 지희겸(池喜謙)[일명 이형철, 지활]을 주하로 파견하여 중국 공산당 주하현 특별 지부 위원회로 재건하고, 지희겸을 특별 지부 서기, 김백파를 조직위원, 김석휘(金石輝)를 선전위원으로 임명하였다.
주하 특별 지부는 조직된 후 주하 지역 당 조직 건설과 발전 사업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한편 1932년 2월에 구세령(具世領)을 연수 보흥(寶興)에 파견하여 연방[연수, 방정] 지역의 당 사업을 지도하도록 함으로써 연방 지역에서도 중국 공산당 조직이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여름철에 이르러서는 주하 특별 지부 산하에 2개의 당 지부, 5개의 당 소조가 구성되었으며, 당원이 5~60명에 달하였다. 이 당원들 중의 절대 다수는 조선인이었다.
1932년 6월에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에서는 성위 순시원 최동범(崔東范)[이복림]을 주하현으로 파견하였다. 최동범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주하현 특별 지부는 중국 공산당 주하 중심 현위원회가 되었다. 이 때 지희겸을 중심 현위 서기, 최동범을 조직부장, 이추악을 부녀 위원, 김책을 군사 위원으로 각기 임명하였다. 그리고 인근의 위하, 연수, 방정 등에서도 사업을 지도하게 되었다.
이 시기 전현의 당원은 40여 명이었는데, 김종태(金鐘台)를 현위 비서, 백성기(白聖基)를 현위 순시원으로 각기 임명하였고, 김세일(金世一), 이계동, 김백파, 김로흠(金魯欽), 최충렬(崔忠烈), 이태(李泰), 최동범, 김병환(金炳煥), 지희겸, 이추악, 김책(金策) 등을 주하현성, 하동, 우지미, 석두하자[밀봉 남쪽], 삼고류, 판자방(板子房), 양가가(楊家街) 등 여러 지역에 파견하였다. 그들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석두하자에서 중국인 6명, 하동에서 2명, 일면파에서 2명, 현성에서 1명, 원보진에서 2명, 동빈[연수]에서 1명을 당원이 되면서 주하 중심 현위가 더욱 발전하였다.
1933년 5월에 열린 현 확대 회의에서 김종태가 해임되고, 김백파가 서기로 임명되었고, 7월에는 김책이 서기로 임명되었으며, 동년 10월에는 관화신(關化新)이 현위 서기로 임명되었다. 1933년 10월 관화신이 현 서기로 된 후 현위의 서봉산이 조직부장, 김인식(金仁植), 김선기(金善基), 왕조길[중국인]이 조직위원으로, 각기 임명되었으며, 서00[이름 미상], 김창수(金昌洙)가 선전부장, 전성길, 최충렬이 선진 위원으로 각기 임명되었다. 현위의 비서처 처장으로는 지희겸, 김책, 후00[중국인, 이름 미상]이 활동하였다.
이 시기 현위 위원으로 활동하였던 조선인들은 이추악[부녀 위원], 이계동, 김창수, 등운산(鄧雲山), 최충렬, 김기본(金基本) 등이었고, 정춘고(鄭春高), 김동환(金東煥), 최동범, 정춘만, 박일훈(朴一勳) 등이 현위 특파원으로 파견되어 당의 사업을 지도하였다.
1935년 가을에는 주하 중심 현위 산하에 철북구위, 철남구위, 야동리구위, 쌍동구위, 위하구위와 연방 특별 지부 등이 60여 개의 당 지부와 300여 명의 당원이 조직되었다.
중국 공산당주하현 조직 건설과 항일 투쟁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1930년 9월 주하 당 지부는 중국 공산당 북만 특위의 지시에 의해 중국 공산당 주하현 특별 지부 위원회로 발전하였고, 1930년 10월 특별 지부는 다시 중국 공산당 주하현 위원회로 변경되었다. 같은 시기 중국 공산당 주하현위의 영도 아래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 주하현 위원회가 조직되었는데, 주하 지역 첫 청년단 조직이었다.
1931년 ‘9·18’ 사변 후, 서기인 전해선이 변절하여 당 조직을 일제에 밀고하면서 주하현위는 해체되고, 32명의 당원 모두가 중국 공산당과의 연계가 끊어지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에서는 1931년 12월 주하현위를 중국 공산당 주하현 특별 지부 위원회로 다시 재건한다.
1935년 가을, 주하 중심 현위는 산하에 60여 개의 당 지부와 300여 명의 당원이 있는 조직으로 발전하게 된다.
우지미 일대는 주하 지역의 철남과 철북을 이어주는 곳으로 매우 중요한 곳인데, 1932년 봄 이계동은 이곳에서 조선인 당원들과 함께 반일 선전 구호를 붙이거나 삐라를 살포하는 형식으로 반일 사상을 고취시켰다. 한편 주하현 하동에서는 6~70여 명의 농민들이 일면파와 마연 사이의 철도를 파괴하는 활동을 벌였다. 이런 활동에 고무된 주하 중심 현위에서는 하동에 김책, 최동범 등을 파견하여 더욱 적극적인 반일 활동을 벌이게 된다.
특히 1932년 8월 29일 경술 국치(庚戌國恥)일을 맞이하여 대규모 대중 시위를 벌이게 되었다. 이 시위는 약 1,000여 명이 참여하였으며, ‘일제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주하현성 거리를 행진하였다. 이와 같이 하동에서 발생한 두 차례의 철로 파괴와 시위는 주하현에서 처음으로 일제에 대항하여 일어난 반일 운동으로 주하현민들에게 반일 정서를 고취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도 하동에서는 1933년 2월 일제가 조직한 하동 농장 설립을 반대하는 투쟁을 2차례 일으켰다. 그러나 1933년 4월 백성기의 변절로 인하여, 하동의 당원 70여 명이 체포되고 주하 중심 현위가 기관이 파괴되는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이에 주하 중심 현위는 하동에서 삼고류로 자리를 옮겨서 활동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주하 중심 현위에서는 각 지역에 당원을 파견하여 반일회를 비롯한 각종 반일 단체를 세웠으며, 1933년 10월에는 주하 반일 유격대를 창립하여 무장 투쟁에도 나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