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邱山 慘案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구산촌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학살사건 |
|---|---|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32년 3월 |
| 종결 시기/일시 | 1933년 2월 12일 |
| 발생|시작 장소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구산 |
| 종결 장소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구산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구산에서 일본 군경들에 의해 1932년 3월부터 1933년 2월까지 세 번에 걸쳐 자행된 학살 사건.
1932년 3월 일본 군경들은 화룡현 이도구 부근의 마을에서 20여 명의 무고한 주민들을 구산에 끌고 가서 살해하였다. 또 같은 해 12월에는 용포촌의 모든 청년들을 체포한 후 공산당원 김주균 등 3명을 구산에 끌고 가서 죽였다. 마지막으로 1933년 2월 12일에는 삼도구 구위 서기인 안학선 등 5명을 구산에서 살해하였다.
일제가 실행한 ‘삼광 정책(三光政策)’은 모조리 죽이고(殺光), 모조리 불사르고(燒光), 모조리 빼앗는(搶光) 것을 말한다.
1931년 ‘9·18 사변’ 이후 연변은 항일 투쟁이 활발히 벌어졌다. 일제는 자기들이 식민 통치를 확립하기 위하여, 이른바 ‘치안 숙정 계획’을 제정하고, 연변 지역에 끊임없는 ‘토벌’을 자행하였다.
일제는 1932년 4월부터 조선나남에 주둔하고 있던 일제 조선군 제19사단으로 이루어진 ‘간도 파견대’를 연변에 보낸다. 또한 장춘, 영안에서도 일본군을 연변으로 파견하여 야만적인 토벌을 실시하였다.
일제는 이 때 비행기와 대포까지 동원하여 381차의 토벌을 감행하여, 연길현 의란구, 왕청현 대감자, 덕원리, 전각루 등지를 폐허로 만들었고, 약 4,000여 명을 살해하는 끔찍한 학살 사건을 저질렀다.
1932년 3월, 같은 해 12월, 1933년 2월 12일 3차례에 걸쳐 민간인들을 구산으로 끌고 가 학살하였다.
1932년 3월부터 33년 12월까지 화룡현 이도구 부근의 마을, 용포촌, 등지에서 3차례에 걸쳐 약 30여 명의 무고한 주민들을 구산에 끌고 가서 살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