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정서

한자 軍政署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항일 무장 투쟁 단체
설립자 여준|이탁|이상룡 등|한족회
설립 시기/일시 1919년
이전 시기/일시 1920년 10월
개칭 시기/일시 1920년 3월
최초 설립지 유하현 삼원보
주소 변경 이력 길림성 액목현
정의

서간도 지역에서 결성되었던 군정부가 1920년 3월말 임시 정부의 명령으로 여준(呂準) 등이 참여한 간부 회의를 통해 명칭을 변경한 단체.

개설

군정서는 1920년에 서간도 지역에서 조직된 무장 투쟁 단체였다. 군정부로 시작되었으나 상해 임시 정부를 지지하는 의미에서 군부라는 명칭을 군정서로 변경하였다. 군정서에서는 독립군 양성과 조선인에 대한 언론·교육활동을 통해 민족 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였던 단체였다.

설립 목적

1919년 11월 17일 상해 임시 정부의 특별 국무 회의에서 서간도의 여러 단체로부터 타협안이 제출됨에 따라 서간도의 군사 기관인 군정부(軍政府) 및 자치 단체인 한족회는 임시 정부 통치하에 두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한족회와 군정부는 1920년 3월말 임시 정부의 명령에 의하여 여준(呂準)·이탁(李沰) 등 27명의 간부들이 모여 회의한 결과 ‘군정부는 군정서(軍政署)로 하고, 보통 행정은 한족회의 명의로 준용한다.’고 결정하였다. 군정서로 부르게 된 한족회의 군사 기관은 이후 ‘서로 군정서(西路軍政署)’로 불렸다.

변천

군정부에서는 군대를 편성하고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진공할 계획을 수립하고,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조직 체계도 정비하였다. 이상룡이 최고 책임자인 총재에 임명되었고, 여준(呂準)이 부총재, 그리고 이탁(李沰)이 참모장을 각각 담당하게 되었다.

군정부에서는 1919년 4월 초순 부민단·자신계·교육회 등을 중심으로 유하현·통화현(通化縣)·환인현(桓仁縣)·집안현(輯安縣)·임강현(臨江縣)· 해룡현(海龍縣) 등 각 현(縣)의 지도자들을 모아 ‘한족회(韓族會)’라는 재만 동포의 자치 기관도 설치하도록 하였다.

군정부의 명칭은 상해에서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면서 변경되었다. 임시 정부는 여운형(呂運亨)을 군정부에 파견하여 통합을 요청하였고, 이 과정에서 이상룡이 ‘정부’라는 명칭을 양보하였다. 그 결과 1920년 3월말 군정부는 임시 정부에 참여하였고, 명칭을 ‘서로 군정서’로 개칭하였다.

1920년 10월 23일 일제가 철령(鐵領)의 보병 제19 연대 및 공주령(公主領)의 기병 제12 연대를 동원하여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자, 군정서는 본부를 북만주의 액목현(額穆縣)으로 옮겼다.

또한 안도현(安圖縣) 지역에 있던 독립군들은 소·만 국경 지대인 밀산(密山)을 거쳐 소련의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였으나 러시아군에 의해 무장 해제를 당하였다. 이에 서로 군정서원들은 뿔뿔이 흩어져 다시 북만주의 영안(寧安)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편 액목현으로 본부를 옮긴 서로 군정서는 임시 정부 군무부, 군무 국장인 황학수(黃學秀)를 맞이하여 1921년 5월에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그리고 위원제를 채택하여 위원장에 이탁, 경리 위원장에 이진산(李震山), 학무 위원장에 이상룡의 동생인 이봉희(李鳳羲), 법무 위원장에 김동삼, 참모장에 황학수, 총사령관에 박용만(朴容萬) 등을 임명하여 조직을 정비하여 갔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서로 군정서는 독판제(督辦制)로 운영되었다. 최고 지휘부인 독판부 아래에 무장 활동을 담당하는 사령부·참모부·참모처 등을 두었으며, 무장 활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할 수 있도록 보조해 주는 정무청·내무사·법무사·재무사·학무사·군무사 등을 설치하였다. 입법 및 주요 안건의 결정 기관으로서 서의회(署議會)를 두었으며, 지방 조직으로는 분서(分署)를 두어 무장 독립운동의 효율성을 꾀하고자 하였다.

서로 군정서에서 활동한 주요 인물을 보면, 독판 이상룡·부독판 여준(呂準)·정무 총장 이탁· 내무 사장 곽문(郭文)· 법무 사장 김응섭(金應燮)· 재무 사장 남정섭(南廷燮)·학무 사장 김형식(金衡植)· 군무 사장 양규열(梁圭烈)· 참모 부장 김동삼(金東三)· 사령관 지청천(李靑天) 등이다.

서로 군정서의 주요 사업과 활동 사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이 단체는 무장 투쟁을 위해 군자금을 모금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관할 지역의 한인 자치 기구였던 한족회를 통해 약 1만여 호의 한인 각호(各戶)마다 일원오각(一元五角)을 부담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 지역 대부분의 농민들은 가난하였기 때문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19년과 1920년 사이 군자금을 위해 국내에 파견되었던 특파원들이 평안도· 경북 등지에서 상당한 금액을 모금하였다.

둘째, 이 단체는 3·1 운동 이후 ‘신흥 중학(新興中學)’에 입교하기 위해 탈출한 청년들을 교육하기 위해 학교를 확장하였다. 이를 위해 군정서는 1919년 5월 3일 유하현 고산자 하동(河東) 지역에 40여 칸의 병사(兵舍)와 연병장을 부설하고, 명칭을 ‘신흥 무관 학교(新興武官學校)’로 개칭하였다.

셋째, 이 단체는 모집된 군자금과 독립군을 바탕으로 국내 및 서간도 지역의 친일세력을 제거하기도 하고, 국내로 들어가 일제의 주재소나 관공서 등을 습격·파괴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친일 세력의 제거는 주로 서로 군정서의 핵심 부대인 의용군(義勇軍) 제1 중대에 의하여 이루어졌으며, 이 부대는 1914년 통화현에서 무장 부대인 백서 농장(白西農庄)을 운영하던 채찬(蔡燦)·신용관(辛容寬)에 의해 지도되었다. 이후 채찬 등에 의하여 세력이 확충되어 병력이 900명에 달하였으며, 본부는 집안현· 통화현 등지에 두었다.

넷째, 이 단체는 관할 구역의 재만 동포들에게 민족 의식을 고양시키고, 새로운 지식을 전달하기 위하여 1919년 6월 24일 기관지인 『한족 신보(韓族新報)』를 창간하였다. 한족회를 통해서 발간된 이 신문은 순 한글로 1주일에 2회 간행되었으며, 편집은 방기전(方基甸), 집필은 이시열(李時悅)· 허영백(許英伯)· 오치무(吳致武) 등이 담당하였다.

그러나 신문을 발행하던 한족 신보사(韓族新報社)는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관헌에 의해 폐쇄되고, 인쇄기 등이 모두 몰수되었다. 이에 한족회에서는 신문의 명칭을 『새 배달』이라고 고쳐서, 삼원보 배달촌에서 간행하였다. 이때 발행인은 천세춘(千世春)이었다.

의의와 평가

1920년대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단체로서 무장 투쟁과 교육 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참고문헌
  •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소 편,『한국 독립운동사 사전』5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소, 2004)
  • 반병률,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49-만주· 러시아 지역 항일 무장 투쟁』(독립 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소, 2009)
관련항목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