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高麗 共産靑年會(ML派)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단체 |
|---|---|
| 설립자 | 양명|고광수|한빈 |
| 설립 시기/일시 | 1926년 3월 |
| 해체 시기/일시 | 1928년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26년 3월 5일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26년 5월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27년 1월 19일-22일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27년 10월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28년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5년 4월 18일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26년 3월 |
| 최초 설립지 | 경성부[현 서울시] 훈정동 |
북경의 혁명사, 일본의 일월회, 서울파[신파] 등이 조직한 사회주의 운동 분파로서 1926년 3월에 조직된 레닌주의 동맹에서 유래한 단체.
고려 공산 청년회(高麗共産靑年會)는 1925년 4월 18일 경성부 훈정동박헌영의 집에서 김단야·조봉암 등과 비밀리에 조직된 공산주의 청년 동맹 조직을 말한다. 약칭 고려 공청이라고도 한다. 일제에 의해 치안 유지법으로 탄압을 받아 해체와 재건을 반복하다가 1928년에 해체되었다.
엠엘[ML파]는 마르크스-레닌주의파의 준말이며, 베이징의 혁명사·일본의 일월회·서울파[신파] 등의 운동 세력이 조직한 사회주의 운동 분파로서 1926년 3월에 조직된 레닌주의 동맹에서 유래하였다.
1926년 3월 5일 북경의 혁명사(革命社) 출신의 양명(梁明) 등은 ‘분열된 운동선의 통일’을 위해 레닌주의 동맹을 조직하였다. 여기에는 양명을 비롯하여 서울파의 고려 공산 청년 동맹의 한빈(韓斌)·월성(越星), 서울파 고려 공산 동맹의 이정윤(李廷允)·이인수(李仁秀)·한명찬(韓明燦)·이재하(李載夏)·이계심(李啓心)·정의식(鄭宜植), 화요파 고려 공산 청년회의 고광수(高光洙) 등 10명이 참가하였다. 그 결과 레닌주의 동맹의 혁명사·만주 공청·서울 신파 세력과 일월회 세력 등이 결합하여 ML파가 형성되었다.
조선 공산당은 최원택(崔元澤)·김동명(金東明)· 조봉암(曺奉岩) 등을 만주에 파견하여, 1926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김철훈(金哲勳)·윤자영(尹滋英)·김하구(金河球)와 함께 길림성 위하현(葦河縣) 일면파(一面坡)에서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을 결성하였다. 만주 총국은 만주 전역을 3개의 구역국(區域局)으로 나누고, 용정에 동만 구역국·의란 부근 동지선(東支線) 철도 연변에 북만 구역국, 반석에 남만 구역국을 두었다.
또한 만주 총국은 청년 단체의 조직 및 관리를 위해 김동명을 책임자로 하는 ‘고려공산 청년회 만주 총국’이 영안현에서 결성되었다. 공청 만주 총국은 출범하자마자 이미 만주에서 강력한 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던 만주 공청파를 배제하면서 대립하게 되었다.
이에 김동명은 만주 공청파의 주장을 받아들일 것을 건의하고, 1926년 가을 무렵 당·공청 만주 총국의 간부진이 모두 개편되면서 박윤서 등 만주 공청파의 일부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은 여전히 화요파가 장악하고 있었고, 공청 만주 총국은 여전히 만주 공청파[ML파]가 장악하고 있었다.
공청 만주 총국은 1927년 1월 19일부터 23일까지 열린 제1회 만주 단체 협의회에서 당의 지도를 인정하고 민족 운동과 농민 운동에 대한 지도권을 당에 넘기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이 두 단체는 공청 만주 총국의 본부 이전 문제와 ‘범칙 당원 처벌’ 처리 문제로 균열되었다.
한편 1927년 10월 발생했던 ‘제1차 간도 공산당 사건’으로 동만 구역국은 일제로부터 집중적인 타격을 받아 완전히 궤멸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공청 동만 조직은 별다른 피해가 없었다. 이 사건 이후 ML파는 만주 전역에서 활동 공간을 넓히는데 유리한 조건에 놓이게 되었고, ML파 대 비ML파라는 경쟁 구도가 만주 전역에 확대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27년 10월 9일 검거를 모면한 ML파의 간부들은 영안현 장하(章河)에 모여 향후 방안을 논의한 결과 기층 조직을 재건하면서 일제와 중국 지방정부의 동태를 파악하기로 결정하였다. 동시에 당 만주 총국 조직부장에 전용락, 선전부장에 김복만을 임시로 보충하였다. 동만도의 사업은 남아있는 당원들이 잠시 책임지기로 했다. 만주 총국과 동만도 간부 사이를 연결하는 책임은 임민호·전용락·김기철(金基哲)등이 맡기로 했다. 그러면서 당 만주 총국과 동만도 간부의 성원은 공청 곧 ML파에서 선발할 것을 결정했다. 화요파가 와해된 상황을 이용해 ML파 중심으로 당 조직을 꾸리겠다는 의미였다. 그리고 1928년 4월에는 북만의 영고탑에서 공청 만주 총국도 결성했다.
반면에 많은 성원들이 검거된 화요파는 김찬의 지도 아래 1927년 11월 영안현 동경성(東京城)에서 당 만주 총국의 후보 위원이던 이동산(李東山)이 책임 비서가 되어 조직 부장 김성득(金聖得), 선전 부장 김홍선(金弘善) 등으로 구성된 화요파 당 만주 총국을 다시 꾸리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같은 무렵 역시 김찬의 지도 아래 북만의 영고탑에서 공청 만주 총국을 재건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조직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이 ML파와 화요파가 독자적으로 당 만주 총국을 구성하게 되자, ML파의 박윤서는 당 중앙에 ML파로만 구성된 만주 총국 간부 명단을 제출하였다. 당시 당권을 장악하고 있던 ML파의 안광천 중앙은 1928년 3월 ML파 만주 총국 간부 책임 비서 이경호, 위원 박윤서·이순 등을 승인했다.
이에 대해 화요파는 동의하지 않았고 자파의 만주 총국을 고수하였고, 제1차 간도공산당 사건에서 피해를 적게 입은 상해파도 1927년 8~9월 무렵 ‘재만 조선 공산주의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 조직의 지도 소조는 윤자영·이운혁·장도정·김철수·김영만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제 만주에서는 화요파·ML파·서울 상해파가 서로 당 만주 총국의 정통성을 놓고 경쟁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경쟁 상황은 1928년 ‘민족 유일당 결성 운동’이 본격화되자 ‘개인 본위론’을 주장하는 ML파와 ‘단체 본위론 및 단체 중심론’을 지지하는 화요파와 일부 서울파 등으로 분열되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1927년 1월 19일-22일에 재만주 한인 공산주의 운동 대열을 통일하기 위해서 ‘고려 공산 청년회 제1회 만주 단체 협의회(滿洲團體協議會)’를 개최하고, ‘만주 공청파’[재만주 엠엘파] 그룹이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에 합류하였다.
이 협의회에는 만주 공청파의 박윤세(朴允世)·이종희(李種熙)·김광은[金光恩, 일명 김월성(金越星)]·김바실리·박명희·유일근(柳一根)·최붕학(崔鵬學)· 강우(姜宇)·김복만[金福萬, 일명 김인국(金仁國)]·김동수(金東守)·김송렬(金松烈)·이정만(李正萬)·이함산·손경호(孫京鎬)·강진(姜珍) 등이 참석하였다.
만주 공청 그룹 이외에 코민테른을 대표한 ‘호로벨’, 고려 공청 중앙 집행 위원회를 대표한 김강(金剛), 조선 공산당 중앙 및 만주 총국을 대표하는 조동호(趙東祜)·남만춘(南萬春)·김동명(金東明) 등도 출석하였다. 4일간 계속된 이 협의회 첫날의 의제는 국제 정세에 관한 것으로, 보고자는 코민테른 파견원 호로벨이었다. 정치 문제에 관한 기조 발표는 남만춘의 「반제국주의 전선」이었다. 보고와 토론이 끝난 뒤 결정서가 채택되고, 민족주의자와의 통일 전선 정책이 천명되었다.
또한 협의회 참석자들은 전 한국적 규모의 유일 민족 혁명당 조직의 필요성을 시인하고, 그를 위한 첫 걸음으로서 재만주 조선 민족 단체 통일 운동에 참가할 것을 결정하였다. 조직 문제에 관한 토론은 박윤세의 「조직과 건설」이라는 보고에 기초하여 이루어졌고, 토론 끝에 조직 문제에 관한 결정서가 채택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할 사항은 고려 공청 만주 비서부가 앞으로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의 지도하에서 활동한다는 것이었다. 고려 공청 만주 비서부의 책임 비서였던 박윤세는 조선 공산당에 대한 충성을 서약하는 맹세문을 작성하여 국제 공청 앞으로 제출하였다. 이후 ‘고려 공산 청년회 만주 비서부’는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의 지도하에 활동하는 ‘고려 공산 청년회 만주 총국’으로 재조직되었다.
협의회는 공청원 가운데 열성자를 당원으로 입당시킨다는 결정을 채택하였고, 회의가 끝난 뒤 만주 공청 그룹의 ‘최고 열성자’ 60명은 1927년 1월에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에 입당하였다. 협의회는 고려 공청 만주 총국의 군중화 방침을 채택하며, ‘만주 공청’이 종래 자임하고 있었던 독자적 공산주의 그룹의 역할을 공식적으로 폐기하고, ‘공청 선봉주의’를 더 이상 견지하지 않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협의회 이후에 조선 공산당과 고려 공청 만주 총국은 ‘화요파’와 ‘만주 공청파’의 연합 진영으로 편성되었다.
이로 인해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을 장악하고 있던 ‘화요파’ 진영과 새로 합류한 ‘만주 공청파’ 진영이 긴밀하게 협력하게 되었다. 두 파의 연합이 유지되는 기간 동안에 만주 지역 조선인 반일 운동 내에서 공산당의 영향력은 현저히 강화되었다. 하지만 1927년 10월에 있었던 ‘제1차 간도 공산당 탄압 사건’을 거치면서 두 파의 연합은 와해되었고, 독자적으로 조선 공산당과 고려 공산 청년회의 만주 총국을 조직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