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高麗 革命軍 政議會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군 부대 통합을 목적으로 조직된 단체 |
|---|---|
| 설립자 | 코민테른 극동 비서부|이르크츠크파 고려 공산당 |
| 설립 시기/일시 | 1921년 3월 중순 |
| 설립 시기/일시 | 1921년 5월 18일 |
| 해체 시기/일시 | 1921년 8월 |
| 최초 설립지 | 러시아이르크츠크 |
코민테른 극동 비서부와 이르크츠크파 고려 공산당에 의해 선임된 한인 통합 무장 부대 고려 혁명군 지휘부로 조직된 단체.
고려 혁명군 정의회는 노령과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부대를 통합하여 고려 혁명군을 편성하기 위해서 조직되었다.
고려 혁명군 정의회는 1921년 3월 중순 이르크츠크에서 코민테른 극동 비서부에 의해 조직된 한인통합 무장 부대 고려 혁명군 지휘부에서 비롯되었다. 조직 당시에는 임시 고려 혁명군 정의회였는데 이르크츠크에서 고려 공산당 창립 대회가 종료된 직후인 1921년 5월 18일 정식으로 결성되었다.
임시 고려 혁명군 정의회는 다음과 같은 조직을 갖추었다. 조직 구성은 총사령관 갈란다라쉬빌리(러시아인), 부사령관 오하묵(吳夏黙), 임시 참모부장 유수연(兪洙淵), 의원 김하석(金夏錫)·채성룡(蔡成龍) 등이었다.
갈란다라쉬빌리 총사령관은 빨치산 전투에 경험이 많은 비정규전의 전문가로서 일본군 및 세메노프군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뛰어난 공로를 거뒀다. 또한 그는 소비에트 러시아 정부와 극동 공화국 정부의 신임이 높았기 때문에 군대의 출동 및 보급 문제에 관해 원만한 교섭이 가능한 인물이었다. 그는 총사령관에 취임하면서 ‘고려 혁명에 헌신하여 한인 무장 부대와 흥망을 같이하겠노라’고 서약하였다. 이외의 간부들은 대한국민 의회의 군사 지도자(오하묵·김하석)이거나 이르크츠크 전러 고려 공산당 중앙총회의 정치지도자 채성룡이었다.
임시 고려 혁명군 정의회는 한인 군대를 통합하기 위해 당시 이르크츠크의 러시아 적군 제5군단 산하에 600명으로 구성된 고려 공산대대를 고려 혁명군으로 편제하고, 한인 무장 부대들이 집결해 있는 아무르주로 이동하였다.
그 결과 1921년 3월 아무르주에는 원동공산총국 한인부가 조직한 전한군사위원회와 임시 고려 혁명군 정의회가 존재하게 되었다. 두 기관은 서로 자신들이 유일한 군사 최고 기관이라고 주장하며 대한 의용군이나 고려 혁명군으로 통일하려고 경쟁하였다.
하지만 재러 한인 군대의 관할권이 극동 공화국으로부터 코민테른으로 이관되고, 1921년 4월말에 원동 공산 총국 한인부가 해체됨에 따라 전한 군사 위원회와 대한의용군 측의 영향력은 급격히 약화되고 말았다. 특히 치따 원동총국 한인부의 주요 간부인 박애·계봉우·장도정·김진 등은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에 의해 명령 불복종에 ‘반당’ 혐의로 체포되었고, 전한 군사 위원회의 중요 간부인 이용(李鏞)도 체포 대상이 되었다.
임시 고려 혁명군 정의회 지도부는 1921년 5월 2일 자유시에 도착한 후 대한의용군을 관할하고 있던 극동 공화국 제2군단과 교섭에 들어갔다. 당시 한인 군대들은 대한 의용군의 지휘 하에 마사노프에 주둔하고 있었다. 극동 공화국 군부로부터 한인 군대를 이관하라는 지시를 받은 제2군단 사령부는 대한 의용군을 임시 고려 혁명군 정의회에 인계하기 위한 절차를 밟아 나갔다.
임시 고려 혁명군 정의회는 예비 수속을 끝낸 뒤 대한의용군 산하 각 한인 무장 부대에 고려 혁명군 산하에 재편제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대한의용군 지도부는 이에 따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임시 고려 혁명군 정의회 지도부가 그들을 응징할 수단이나 실제적인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 당시 자유시에 주둔했던 고려 혁명군 측의 병력 수는 600명에 불과하였지만, 마사노프에 주둔하고 있던 대한 의용군 측의 병력 수는 2,000명에 달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고려 혁명군 정의회는 고려 공산당 창립 대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이르크츠크에서 고려 공산당 창립대회가 종료된 직후인 1921년 5월 18일 정식으로 고려혁명군 정의회가 선임되었다. 임원 선임은 고려공산당 중앙 간부에서 후보자를 추천하고, 코민테른 극동비서부가 승인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지도부는 총사령관에 갈란다라쉬빌리, 군정의원에 유동열(柳東說)·최고려(崔高麗) 등으로 구성되었다.
고려 혁명군 정의회는 곧바로 한인 무장 부대들이 집결해 있는 아무르주로 출발하였다. 이들은 갈란다라쉬빌리의 지휘 하에 러시아 내전에 참전했던 코카사스 기병 600명을 인솔하고 있었다. 이들은 1921년 5월 23일 극동공화국 수도인 치따에 도착하였다. 그곳에서 극동공화국 총사령관 라삔과 더불어 한인부대의 재편성 및 활동방침에 관한 대책을 협의하고, 그해 6월 6일 아무르주 자유시에 도착하였다.
고려 혁명군 정의회는 임시 고려 혁명군 정의회 지도부로부터 그동안의 상황을 보고받고, 「사무 집행 전말서」를 접수하였다. 이후 정식으로 고려 혁명군 정의회가 사무를 집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한 의용군은 고려 혁명군 정의회의 명령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러한 양자 간의 분쟁은 결국 자유시 참변(1921년 6월 28~29일)으로 폭발되었다. 고려혁명군 정의회는 설립 당시 한인 부대를 통합하여 대규모 군대를 편성한 뒤에 극동공화국 영내를 벗어나, 압록강·두만강 일대에서 유격 투쟁을 전개하고자 했다.
그러나 코민테른 극동 비서부는 1921년 7월 5일 만주로 출동할 계획을 정지하고, 속히 군대를 영솔하여 이르크츠크로 회군하라는 전보를 고려 혁명군 정의회 앞으로 발신하였다. 이는 극동공화국과 일본 사이에 상호 적대 행위의 금지를 논의하기 위한 대련 회의가 개최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한인 무장 부대를 극동공화국의 영내에 주둔시킬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영내로 한인 군대를 통과시키는 것도 곤란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 혁명군 정의회는 새로운 정세에 대응하는 원대한 새 계획의 입안하고,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지시에도 응하기 위해 극동공화국의 영토에서 벗어나 이르크츠크로 회군한 것이다. 1921년 8월 5일 고려 혁명군은 이르크츠크를 향하여 출발하여, 8월 말에 도착하였다. 당시 고려 혁명군의 병력 총수는 갈란다라쉬빌리를 수행했던 코카사스 기병 및 기타 중국인 병사를 제외하면 1,745명이었다.
이르크츠크에 도착한 고려 혁명군은 소비에트 러시아 제5군단 예하의 1개 여단으로 재편[여단장-갈란다라쉬빌리, 정치부장-채동순(蔡東順)]되면서, 고려 혁명군 정의회도 해산되었다. 이후 최고 군사 기관이 다시 등장한 것은 1922년 6월 고려공산당 임시 중앙 간부에 의해 고려 혁명군정청이 설립되면서였다.
고려 혁명군은 노령과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군 부대가 연합해서 편성한 통합부대였다. 고려 혁명군은 1921년 6월 28~29일 자유시 참변을 거친 뒤 성립하였다. 이후 이르크츠크에서 군사·정치 훈련에 종사하다가 1922년 하반기에 연해주 해방전쟁에 참전하였다. 1922년 말 내전 종료 후 소비에트 러시아 당국의 비정규 무장부대 해산 방침에 따라 해체됐다.
고려 혁명군의 일부 구성원들은 러시아 적군에 정식으로 편입되어 재소련 한인들만으로 구성된 러시아 적군 제76연대의 근간이 되었다. 또 다른 일부 구성원들은 제대 후 한국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 가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