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만 조선인 청년 총동맹

한자 北滿 朝鮮人 靑年 總同盟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흑룡강성 하얼빈시 아성구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북만지역 청년단체 연합을 추구한 단체
설립자 대동 청년회|중동선 조선인 청년 연합회|동일 청년 연합회|프로 청년회|아성 청년회
설립 시기/일시 1926년 5월 10일(15일)
최초 설립지 흑룡강성 하얼빈시 아성시
정의

1926년 5월 하얼빈의 아성현 개성 학교에서 개최된 북만지방 각 청년 단체 대표회의에서 단체의 통일을 표방하며 결성된 단체.

개설
설립 목적

1920년대 초반 만주지역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급격히 전파되면서 젊은 지식인과 학생·청년들 사이로 확산되었다. 사회주의를 수용한 이들은 단체를 결성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풍속 개량, 음주·도박 금지, 신문화 습득 등의 활동을 전개하고, 사회주의 사상도 공부하려는 것이었다. 이 시기 만주지역의 민족 운동은 반봉건적인 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수양적 성격을 갖고 있는 이러한 청년단체의 등장은 이주 한인들의 뜻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래서 마을을 중심으로 많은 청년 단체가 결성되었고, 이를 통해 효과적인 수양과 항일 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당시 사회주의 운동 계열의 파벌 관계로 북만지방의 청년운동은 통일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 조직을 통일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변천

1925년 11월 만주 고려 공산 청년회와 서울 청년회계의 영향을 받는 청년단체가 모여 북만 노력 청년 총동맹이 결성되었으며, 북만 조선인 청년 총동맹은 이에 경쟁하는 세력인 화요회그룹과 상해콤그룹의 영향을 받는 청년 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단체였다. 북만 조선인 청년 총동맹대동 청년회·중동선 조선인 청년 연합회·동일 청년 연합회·프로 청년회·아성 청년회가 발기하고, 신성청년회·노동청년회·9월청년회가 가담하며 결성되었다. 창립 총회식은 1926년 5월 10일(15일) 아성현 개신학교에서 거행되었다.

북만 조선인 청년 총동맹은 성립 후에 국내의 화요회계(火曜會系) 공산주의자와 제휴하였으나, 이후 주요 간부의 이탈로 본거지를 영고탑(寧古塔)으로 옮기고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였다. 이 단체는 만주 지역 청년 단체의 통일을 위해 남만과 동만지방의 청년 단체와 손을 잡고, 1927년 8월 해림(海林)에서 남북 청년 단체 협의회를 열고 서로 연합하기로 합의하였다. 그 결과 1928년 5월 만주 지역 청년 단체의 통일 조직인 ‘재중국 한인 청년 동맹’이 결성되는데 기여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민족 단체의 통일 운동에도 가담하여 1928년 5월에 전민족 유일당 촉성 회의에 참가하였다. 이때 간부 황기찬(黃基贊)·이명도(李明道)를 파견해 개인 본위의 유일당 조직을 주장하는 촉성회파를 지지하였다. 그러나 이 회는 중앙집권제가 아니기 때문에 유일당의 조직이 불가능하다며 탈퇴하였다.

탈퇴 후 송강(淞江)·동만(東滿)·남만·합장(哈長)·여족공의회(麗族共議會) 등 7개 단체와 민족 유일당 촉성 조직 동맹이라는 별개 단체를 조직하였다. 그 뒤 중앙 집행 위원장 김유성(金有聲)과 경상북도 영천 출신 김은한(金殷漢) 외에 간부 1인을 중심으로 세포단체 18개를 조직하며 북만주의 유력한 단체로 성장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북만 조선인 청년 총동맹은 계급적·조직적인 청년 운동의 통일을 촉진하고, 혁신전선에 참가할 군중들을 훈련하고자 하였다. 또한 현실의 모순을 타파하고 합리적인 사회를 건설하여 조선민족의 해방과 사회혁명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결성 당시 ‘계급적 및 조직적 단결과 청년운동의 통일을 촉성하고 혁신전선에 참가하기 위해 군중의 훈련 교양을한다’, ‘자강적 모순인 현 사회를 타파하고 합리적 사회를 건설한다’, ‘조선 민족의 해방과 사회의 혁명 수행을 기한다’. 등의 강령을 채택하였다.

현황

창립대회에서 선출된 간부들을 보면, 중앙 집행위원장 겸 조직부에 박근삼(朴三根), 정치부에 방일정(方一正), 문화부에 김소한(金笑漢), 경리부에 한철수(韓徹秀), 위원에 전승우(田承雨)·송병걸(宋秉屹)·김천수(金千洙)·이종욱(李鍾郁)·권응삼(權應三)·강화인(姜化仁)·김성(金聲)이었으며, 후보위원에 김섭(金燮)·전대일(田大日)·이승권(李昇權)·권형철(權衡鐵)·최희경(崔希慶) 등이 있다. 또한 중앙 검사위원에 권천민(權天民)·박훈(朴勳)·이일우(李一宇)이 각각 선출되었다. 회원은 1926년에 520명이었으며, 기관지로 『농군(農軍)』을 발행하였다.

의의와 평가

1920년대 중반 북만 지역 청년 운동의 통일을 이루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 김철수 등 9명 저, 『중국 조선족 역사상식』(연변인민출판사, 1998)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편, 『한국독립운동사사전』4(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4)
  • 상지시 조선 민족사 편집 위원회, 『상지시 조선 민족사』민족 출판사,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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