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문 일본 영사분관

한자 圖們 日本 領事 分館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지명/시설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일본 외교 기관
개관|개장 시기/일시 1934년
최초 설립지 길림성 연변자치주 도문시
정의

1934년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에 설치된 ‘간도 일본 총영사관’의 영사분관.

개설

도문 일본 영사분관은 1934년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도문시에 간도 일본 총영사관의 분관으로 설치되어 조선인의 항일 운동과 민간인 탄압을 주도하였다.

건립 경위

연변조선족자치주 동남부에 위치하고 있는 도문시는 동쪽으로 혼춘시, 서쪽으로 연길시, 서남쪽으로 용정시, 북쪽으로 왕청현과 인접해있으며, 동남쪽으로는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접경을 이루고 있다.

19세기 말 한인 이주민과 한족들이 이주하여 촌락을 형성하며, 회막동(灰幕洞) 또는 하전자(下甸子)로 불렸다. 1933년 돈도 철도 종점을 회막동으로 정한 뒤에 ‘도문’이란 지명으로 변경되었다.

1909년 9월 4일 중국과 일본은 ‘두만강 중조 계무 조약’[간도 협약]과 ‘동삼성 교섭 5인 조약’을 체결하고, 철도 건설권 및 연변에서의 영사 재판권 등을 획득하였다. 일제는 이 조약의 제2조·제7조의 규정에 의거하여 11월 1일 용정에 설치되어 있었던 ‘한국 통감부 간도 파출소’를 ‘간도 일본 총영사관’으로 개칭하고, 11월 2일 개관하였다. 그리고 국자가, 투도구, 배초구, 혼춘 등의 지역에 영사분관을 설치하였다.

이 총영사관은 일본 외무 대신의 직접 지휘를 받았다. 편제 총영사 1명, 영사[사법 영사] 2명, 부영사 2명, 통역 1명, 문서 5명, 무전 기사 3명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총영사관 산하에는 경찰부, 각 영사분관에는 경찰서를 설치하고, 300여 명의 경찰을 배치하였다. 영사관 내에는 영사실, 경리실[회계실], 무전실, 법정, 경찰서, 감옥 등을 두었다.

1922년 11월 ‘간도 일본 총영사관’이 소실되자 1926년 11월에 다시 건립하였고, 국자가·두도구·백초구·혼춘 등의 상업 도시에 영사분관을 설치하였으며, 1934년에 도문에도 영사분관을 설치하였다.

도문 일본 영사분관이 건립되기 전에는 국자가 일본 영사분관과 경찰서가 도문 지구의 항일 활동을 탄압하였다. 1932년 3월 27일과 28일에 있었던 월청촌 삼동·기풍현·창신동 등지에서 사립 학교와 민가를 불에 태우고 항일 지사 22명을 학살하였다.

1937년 11월 5일 ‘만주국의 치외 법권을 철회하고 남만주 철도 부속지 행정권을 양도할 것에 대한 조약’에 의하여, 12월에 ‘간도 일본 총영사관’과 5개 영사분관 및 경찰 기구들이 철회되었다. 하지만 영사관의 관리들의 대부분은 일본 관동군과 특무 기관에 편입되었고, 경찰들은 괴뢰 정권으로 성립되었던 만주국 경찰 기구에 들어갔다. 총영사관에 설치되었던 ‘특별 수사반’은 ‘간도 특별 공작반’으로 이름이 변경되어, 연변에 거주하는 각국의 사람들을 감시하는 활동을 지속하였다.

간도 일본 총영사관’은 1909년부터 28년간 일제의 침략 정책을 집행하였다. 또한 총영사관은 치외 법권을 행사하며, 많은 인원의 무장 경찰과 특무 기관을 두고 밀정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여 침략 활동과 항일 투쟁을 탄압하였다. 그리고 무장 자위단을 조직하여 일본군과 함께 항일 투쟁을 하는 근거지를 토벌하며, 살인·방화·약탈·강간 등의 범죄 활동을 하였다. 연변 지역의 통계에 의하면 1930년~1935년 사이 연길현의 80만 인구 가운데 2만 여명의 지하 조직원·항일 지사·반일 군중 등이 체포되고 처벌되었다고 한다.

참고문헌
  • 주성화 저, 『중국 조선인 이주사』(한국 학술 정보(주), 2007)
  • 이명근 외,『연변 조선족사』상(연변인민출판사, 2011)
관련항목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