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北滿 勞力 靑年 總同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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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길림성 목단강시 영안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북만주 지역 청년 연합단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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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립자 | 대진청년회(大震靑年會)|중서청년회연맹(中西靑年會聯盟) |
| 설립 시기/일시 | 1925년 11월 16일 |
| 최초 설립지 | 흑룡강성 목단강시 영안시 |
1920년대 초반 만주지역에는 사회주의 사상이 급격히 전파되면서 젊은 지식인과 학생·청년들 사이로 확산되었다. 사회주의를 수용한 이들은 단체를 결성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풍속 개량, 음주·도박 금지, 신문화 습득 등의 활동을 전개하고, 사회주의 사상도 공부하려는 것이었다. 이 시기 만주지역의 민족 운동은 반봉건적인 성격의 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으며, 수양적 성격을 갖고 있는 이러한 청년 단체의 등장은 이주 한인들의 뜻이 반영된 결과였다. 그래서 마을을 중심으로 많은 청년단체가 결성되었고, 이를 통해 효과적인 수양과 항일 투쟁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당시 사회주의운동 계열의 파벌적인 이해 관계로 북만지방의 청년 운동은 통일될 수 없었다. 그래서 이들 조직을 통일하려는 움직임이 일게 되었다.
‘북만 노력 청년 총동맹’은 대진 청년회(大震靑年會)·중서 청년회 연맹(中西靑年會聯盟) 등을 중심으로 1925년 11월에 청년 단체의 통일 대회를 개최하는 과정에서 결성되었다.
‘중서청년회연맹’은 1925년 9월에 우주하현성(현재 상지진)의 대성학교(大成學校)에서 창립된 조선인들의 반일단체이다. 이 연맹은 창립대회에서 조선 민족 해방 운동의 역량을 양성하며 새 사회 건설을 목표로 하여 나아간다는 정치 강령 및 13개 조례의 규약과 대회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또한 북만지역 청년 운동의 통일을 시도하여 추진 중에 있는 ‘북만 청년 총동맹(北滿靑年總同盟)’에 가입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면서 위원장으로 최종혁(崔宗赫), 위원으로 김우식(金宇植)·이철(李哲)·장세훈(張世勳)·김성철(金聖哲) 등을 선출하고, 연맹 집행 위원회를 선출하였다.
한편 화요회그룹과 상해꼼그룹에 경쟁하던 신민부(新民府), 만주 고려 공산 청년회, 서울 청년회계에서는 자신들만의 청년단체를 결성하였다. 예를 들어 창립대회에서 주동진 등의 태도에 불만을 품은 동일청년회·중동선 조선인 연합 청년회·대동 청년회·아성 청년회가 탈퇴하는 파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들 탈퇴 단체는 이듬해 아성현(阿城縣)에서 북만 조선인 청년 총동맹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이에 따라 대진 청년회(大震靑年會)·중서청년회연맹(中西靑年會聯盟) 등을 중심으로 1925년 11월에 청년단체의 통일대회를 개최하는 과정에서 ‘북만 노력 청년 총동맹(北滿勞力靑年總同盟)’이 결성되었다.
이후 이 연맹은 1926년 5월 10일 아성현 개성학교에서 열린 ‘북만 청년 총동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고, ‘아성 청년회’·‘보라 청년회’·‘대동 청년회’·‘동일 청년회’·‘중동철도연선 조선인 청년 연합회’·‘신성 청년회(新星靑年會)’·‘구월 청년회’ 등 여러 반일단체들과 함께 ‘북만 청년 총동맹’에 가담하였다.
이후 북만 노력 청년 총동맹은 주로 ML그룹의 이해를 대변하였는데, 청년 단체의 통일 기운이 조성된 결과 1928년 5월 재중국 한인 청년 동맹의 결성에 합류하였다. 북만 노력 청년 총동맹은 1928년 5월에 개최된 전민족 유일당 촉성회의(全民族唯一黨促成會議)에서 민족진영의 정의부(正義府)와 함께 활동했던 북만 조선인 청년총동맹(北滿朝鮮人靑年總同盟)으로 흡수되었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북만 노력 청년 총동맹은 결성대회에서 ‘1. 본 동맹은 노력청년의 조직적 단결로 새 사회를 건설할 역군 훈련과 교양을 기도함’, ‘1. 본 동맹은 고려 민중 해방운동의 선구되기를 기함’, ‘1. 본 동맹은 무산계급의 해방을 기하며 당면 이익을 위하여 투쟁함’이라는 강령을 채택하였다.
창립대회에서 선출된 간부진을 보면, 책임서기에 주동진(朱東振), 조직부에 주철(朱喆), 교화부에 김동빈(金東軾), 위원에 박석홍(朴錫洪)·이삼(李三)·김영균(金永均)·박기원(朴基元)·이철(李喆)·김우식(金宇植) 등이 선출되었다. 또한 영안현(寧安縣)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기관지 『노력청년』을 발행하였다. 1926년 당시 회원은 380이었다.
1920년대 중반 북만지역 청년 운동의 통일을 이루었다는 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