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柳河縣 野猪溝 事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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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 지역 | 길림성 통화시 유하현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중국 산림대가 한인 무장 투쟁 단체인 통의부 의용대를 공격한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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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인물/단체 | 중국 산림대|통의부 의용대 제7중대 |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22년 10월말 |
| 발생|시작 장소 | 길림성 유하현 야저구 |
1922년 10월말 통의부 의용대 제7중대가 유하현으로 가다가 야저구에서 중국 산림대의 공격을 받은 사건.
장작림은 1910년대 후반부터 일제의 도움을 받아 군비를 강화하고 중국 동북지역을 점령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일제가 도움을 빌미로 제시한 ‘만주에서의 불령선인단체 숙청’ 에 대한 요구에 부담을 느꼈고, ‘불령 선인 토벌’을 빙자한 일본군의 만주 진출도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그는 1920년 이후 자신의 세력권인 봉천성을 보존하기 위해 일제와 결탁하여 남만지역에서 활동하던 한인 무장단체들을 통제하고 탄압하였다. 이를 위해 장작림 정부는 각지의 지방 군경들을 동원하여, 관전·환인·집안·흥경·통화 등의 지역에서 한인들의 항일 단체를 ‘토벌’하였다.·
1922년 10월말 통의부 의용대 제7중대 중대장 서리 김우권은 대원 12명과 함께 유하현으로 이동하다가, 야저구에 있는 조선인 농민 김교성의 집에서 하룻밤을 머물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일본 밀정인 가와모도는 중국산림대 400여 명을 이끌고 오전 8시경에 마을을 포위하고 의용대를 습격하였다.
의용대원들은 대응사격을 하면서 뒷산으로 이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의용대의 후퇴를 지휘하던 중대장 김우권이 중상을 입게 되었다. 대원들이 그를 업고 가려고 하자, 그는 ‘나는 죽으나 너희들은 독립군의 정신을 발양하여 끝까지 싸우라’는 말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대장의 자결을 본 의용대원들은 결사항전을 다짐하고, 김하성·왕유부의 지휘아래 전투에 임하였다. 그러나 이 두 사람과 추가로 김관학·한정도·전명근 등 3명의 대원이 적에게 희생되었다. 나머지 대원들은 결사적으로 포위망을 돌파하여, 밤 10시가 되서야 부대로 귀환할 수 있었다. 귀환한 대원들 가운데 이상용·임정산·신정유 등이 중상을 입었고, 4명만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
중대장 서리 김우권은 경상도 출신으로 3·1 운동 이후 유하현 삼원포로 이주하였다. 신흥 무관 학교를 졸업하고, 환인현 상루하 중학에서 교사로 청년들을 양성하였다. 1920년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서로 군정서의 의용대 청년장교로 통화현·유하현에서 활동하다가, 통의부가 건립되자 제7중대 서리로 임명되었다. 김항성은 1920년 강계군에서 유하현으로 이주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서로 군정서 의용군으로 복무하였다. 야저구 전투시에 그는 의용군 부사였다. 왕유복은 중국인으로 지방 경찰서의 순경을 지내다가 시작하고, 항일 투쟁에 투신하였다. 그는 군정서 의용대 제1중대 1소대에 편입되어 참사로서 야저구 전투에 참여하였다.
중국의 친일 군경들이 한인 무장 단체를 공격한 사례로 참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