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滿洲 高麗 共産主義 靑年會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기관 |
|---|---|
| 설립자 | 박윤세|김삭국 |
| 설립 시기/일시 | 1924년 |
| 해체 시기/일시 | 1925년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23년 6월 29일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23년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24년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25년 1월 21일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25년 9월 |
| 관련 사항 시기/일시 | 1926년 |
| 최초 설립지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
북간도에서 1924년 초부터 1925년 1월까지 활동한 한인 공산주의 청년 단체.
만주 고려 공산주의 청년회는 1924년 초부터 1925년 1월까지 북간도에서 활동한 한인 공산주의 청년 단체로서, ‘만주 공청파(滿洲共靑派)’ 또는 ‘만공파’(滿共派)로 불리는 공산주의 그룹의 첫 조직체라고 할 수 있다.
만주 고려 공산주의 청년회의 기원은 1923년 6월 29일에 북간도 용정에서 설립된 고려 공산 청년회 세포 단체로서, 구성원들은 두 개의 공산주의 그룹에 속해 있었다. 하나는 연해주에 꼬르뷰로 내부의 상해파·이르쿠츠크파 분쟁에 반대하던 공산주의자들 가운데 북간도에 파견된 사람들로서, 박윤세(朴允世)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다른 그룹은 김사국(金思國)을 리더로 하는 ‘서울파’ 공산주의 그룹이었다. 1923년 봄부터 만주 지역으로 조직을 확장하고자 했던 서울파의 김사국·방한민(方漢旻)·김정기(金正琪)·이명희(李明熙) 등이 주도하는 세력은 북간도에서 비밀리에 공산주의 단체를 결성하고, 선전 사업도 활발히 펼쳤다. 이들은 동양 학원(東洋學院)을 설립하고 북간도에서 최초로 마르크스주의 혁명 이론을 가르쳤다.
두 개의 그룹은 재만 한인 공산주의 운동에 대한 이르쿠츠크파의 분파적 지도에 반대하였고, 당시 만주에서 가장 강력한 조직 기반을 가지고 있던 상해파 공산주의 그룹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최초의 고려 공산 청년회 세포 단체는 용정의 동흥 중학을 비롯한 5개 중등 교육 기관에 있었고, 이들은 자신의 조직 위상을 ‘고려 공산 청년회’의 한 지부로 규정하였다. 그러나 조직적 전망을 둘러싸고 서울파는 1922년 11월에 서울에서 성립한 ‘공산당[서울파 공산주의 그룹]’의 산하 기관으로 재편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만주 공청파는 기존의 그 어떤 공산주의 그룹의 지도도 거부하고 국제 공청의 지도 아래 활동하기를 원하면서, 코민테른의 공식 승인이 있기 전까지는 그 어떤 ‘공산당’도 ‘당’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견해 차이로 만주 공청파는 오랫동안 국제 공청의 간부를 역임한 조훈(趙勳)의 지도성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결정으로 서울파 공산주의자들은 간도의 조선인 공산 청년회 조직이 이르쿠츠크파의 영향 하에 배속된 것으로 간주하고, 탈퇴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이 단체는 국제 공청의 지도하에서 활동하는 ‘고려 공산 청년회 간도 총국’으로 1924년 초반에 재편되었다. 이 단체는 ‘재간도 고려 공산 청년회 중앙 총국’으로도 불렸고, 간부는 이순[李順, 책임 비서]·강동주[姜東柱, 조직 부장]·김두형[金斗衡, 선전 부장]·임민호(林珉鎬)·홍범우(洪範禹) 등이었다. 고려 공청 간도 총국은 국제 공청 이외에는 어떤 공산주의 단체에 대해서도 상급의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독자적인 공산주의 그룹이 되었으며, 만주에 진출한 한인 공산주의자 그룹인 상해파·이르쿠츠크파·서울파·북풍파 등과도 경쟁하게 되었다.
1924년 말 이 단체는 북간도[동만주] 뿐만 아니라 만주 전체의 공산주의 청년 운동을 통괄하는 조직으로 개편하기 위해, 중동선(中東線) 철도 연선 일대의 북만주 지방 청년 운동 세력과의 통합을 시도하였다. 당시 북만주에는 1923년경부터 상해파 공산주의자들의 지도하에 ‘중동선 고려 공산 청년회(中東線高麗共産靑年會)’가 조직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이 단체의 지도자는 김성(金星)·허인하(許仁河)·박병희(朴炳熙) 등이었다.
고려 공청 간도 총국의 지도자들은 ‘중동선 고려 공산 청년회’의 지도자들과 1924년 12월 25일에 고려 공청 간도 총국의 대회를 소집하고서, 북만주의 공청과 합동하여 만주 총국을 조직하기를 결의하였다. 이 결정은 고려 공청 최고 기관인 중앙 총국에 보고되고, 1925년 1월 21일에 박헌영(朴憲永)이 책임자로 있던 국내의 ‘고려 공산 청년회 중앙 총국(高麗共産靑年會中央總局)’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오그르뷰로의 승인을 얻었다. 이후 이 단체는 ‘고려 공산 청년회 만주 총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1925년 2월경 이 꼼그룹의 지도자인 박윤서 등은 러시아의 공산 청년 동맹에서 출회당한 14명과 함께 하얼빈에 모여서 ‘고려 공산 청년회 비서부(高麗共産靑年會秘書部)’를 조직하였다. 이때부터 만주 공청 그룹은 러시아 공산 청년 동맹에서 쫓겨난 성원을 중심으로 만주 전역에서 활동하였다.
당시 만주 지역에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을 기대하며 사회주의적 민족 운동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많은 단체들이 결성되었다. 1923년 2월 1일 영고탑에서 최웅렬(崔雄烈)·오성륜(吳成崙) 등이 만주 지역 최초의 한인 사회주의 단체인 적기단(赤旗團)을 조직한 이후, 만주 지역에서 한족 노동당(韓族勞動黨)·재만 농민 동맹(在滿農民同盟)·남만 청년 연맹 등 많은 사회주의 단체가 결성되어 활발한 사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25년 11월 북만 노력 청년 총동맹[영고탑], 1926년 5월 북만 조선인 청년 총동맹[아성현], 1925년 11월 남만 청년 총동맹[반석현], 1926년 1월 동만 청년 총동맹[연길현] 등이 결성되어, 동·남·북만의 주요 지역에서 청년 조직이 확보되었다. 이를 계기로 사회주의 운동 단체의 통합 문제가 시급한 당면 과제로 대두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25년 9월 코민테른의 결정과 같은 해 11월 조선 공산당 중앙의 승인으로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의 설립이 추진되었다.
조선 공산당은 최원택(崔元澤)·김동명(金東明)·조봉암(曺奉岩) 등을 만주에 파견하여, 1926년 5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온 김철훈(金哲勳)·윤자영(尹滋英)·김하구(金河球)와 함께 길림성 위하현(葦河縣) 일면파(一面坡)에서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을 결성하였다. 이때 조봉암·최원택·김동명·김철훈·김하구·윤자영 등은 모두 집행 위원을 맡았다.
중앙 조직으로 비서부·조직부·선전부의 집행 부서를 설치하였고, 책임 비서 조봉암, 선전 부장 윤자영, 조직 부장으로 최원택이 선임되었다. 만주 총국은 본부를 영고탑에 설치하기로 하고, 지방에 지역 각부를 설치하였다. 만주 전역을 3개의 구역국(區域局)으로 나누어, 용정에 동만 구역국·의란 부근 동지선(東支線) 철도 연변에 북만 구역국, 반석에 남만 구역국을 두었다.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은 청년 단체의 조직 및 관리를 위해 김동명을 책임자로 하는 ‘고려 공산 청년회 만주 총국’을 결성하고, 본부는 영안현영고탑에 두었다.
만주 공청 그룹은 남만 지방에 김강·이종림·박병희 등을 파견하여 남만 청년 동맹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동만 지방의 여러 중학교에 세포를 조직하고, 방학에 야학과 강연 등을 통해 사회주의 사상을 전파하였다. 또한 북만 노력 청년 총동맹의 결성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하였다. 이를 통해 이 그룹은 1925~1926년 사이에 남만 지방까지 세력을 확장하였다.
만주 공청 그룹은 ‘고려 공산 청년회 만주 총국’과 정통성 문제를 놓고 대립하였다. 만주 총국 책임자인 김동명은 1926년 8월 하순 용정에서 박윤서를 만나 이 조직의 해산을 언급하고, 회원 자격 문제와 지도 계통 문제를 지적하였다. 이에 만주 공청은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의 간부를 개선할 것', '당 건설의 토대를 만주 공청원으로 할 것', '만주 고려 공산 청년 비서부의 책임자인 박윤서를 만주 총국의 책임자로 임명할 것' 등을 주장하여 만주 총국과 대립하였다.
이에 만주 공청 그룹은 만주 총국에 대응하여 지도부와 동만도 간부를 개편하며 체제를 다시 정돈하였다. 간부에 비서부는 박윤서, 조직부는 이창희, 선전부는 김성이었고, 위원으로는 김복만, 강진, 박병희 등을 두었다. 동만도 간부의 경우, 책임은 강진, 조직부는 김정환, 선전부는 한사빈이었고, 위원은 김복만, 박정길, 박창섭, 원태희, 이창일, 임민호, 전용호, 채세진 등이었다. 또한 동만 청년 총연맹, 민립 중학 기성회, 교육 연구회·사회 과학 연구회, 간도 사상 단체 협의회에 분파를 두었다. 1926년 가을에는 책임 비서에 이인수, 조직부에 박윤서·선전부에 강진, 위원으로 김복만·박병희·한사빈·한익주 등의 간부로 개편되었다.
1927년 1월 19일-22일에 재만주 한인 공산주의 운동 대열을 통일하기 위해서 ‘고려 공산 청년회 제1회 만주 단체 협의회(滿洲團體協議會)’에 만주 공청 그룹[재만주 엠엘파]은 조선 공산당 만주 총국에 합류하였다. 이 협의회에 만주 공청 그룹에서는 박윤세(朴允世)·이종희(李種熙)·김광은[金光恩, 일명 김월성(金越星)]·김바실리·박명희·유일근(柳一根)·최붕학(崔鵬學)· 강우(姜宇)·김복만[金福萬, 일명 김인국(金仁國)]·김동수(金東守)·김송렬(金松烈)·이정만(李正萬)·이함산·손경호(孫京鎬)·강진(姜珍) 등이 참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