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가 농가

한자 安家 農家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흑룡강성 하얼빈시 오상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농업 회사
설립자 공진항
설립 시기/일시 1938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4년 이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4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8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9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42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44년
최초 설립지 길림성 공주령 평안
주소 변경 이력 흑룡강성 오상현
정의

1930년대 만몽 산업 주식 회사가 기획 설계하여 오상시유수시 경계의 라림하를 막아 건설한 농장.

설립 목적

19세기 말부터 많은 조선인들이 만주로 이주하였다. 이러한 조선인의 만주 이주는 대체로 세 시기로 구분된다. 첫째는 1885년 청조의 봉금령 폐지 시기부터 1909년 ‘잠입 이민 시기’, 둘째는 1910년 한일 병합 이후부터 1931년 만주 사변까지의 ‘자유 이민 시기’, 셋째는 1931년 만주 사변 이후부터 1945년 해방까지 일제의 의한 ‘정책적 강제 이민 시기’ 등이다.

이러한 조선인의 만주 이주는 자발적·산발적 이주에서 일제의 식민 정책에 의한 강제적·집단적 이주로 변하였다. 또한 만주국 건설 이후 철도가 새롭게 개통되어 조선과 중국의 동북 지역이 직접 연결되자, 수전 개간이 가능한 지역으로의 이주도 증가하였다.

한편 만주는 일본 내부의 경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공간으로도 활용되었다. 1920년대 말 시작된 세계 공황으로 일본은 내부 경제가 무너지면서 실업률이 증가하고 소작·노동쟁의가 확산되었다. 결국 일본 내각과 군부는 일본 농촌의 피폐가 심각해지고, 중국의 국민 혁명에 따라 일본의 대륙 지배가 동요하는 위기감이 팽배해지게 되자 1931년 9월 무력으로 만주를 침공하였다.

일제의 만주 침공 이후 일제의 지배 세력과 조선인 자본가들은 만주 지역에 농장을 개발하는 것이 유행이면서 매우 유리한 투자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만주 사변 이후 932년 건립된 만주국은 오족 협화(民族協和)를 지배 이데올로기로 내걸었고, 일제는 만주 개발을 정책적으로 지원하였다.

일본의 동아 권업 회사는 이 지역의 토지를 점유하고 300여 정보의 수전을 개발하였으며, 이후 ‘만주 척식 주식 회사(滿洲拓殖株式會社)’를 북만의 수전 개발에 적극 추진하였다. 이를 관동군(關東軍)·협화(協和會) 등이 측면에서 지원하였는데, 이는 농장에서 생산된 쌀이 관동군의 군량미로도 제공되었기 때문이다.

변천

오상현의 한인[조선족] 마을[현재 흑룡강성 오상현 민락향 조선족 자치구]은 하얼빈에서 차로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마을이다. 이 마을에는 본래 왕씨 성의 1개 가구만이 밭농사를 짓고 있었다. 한인의 이주는 1934년부터 시작되었다.

오상 지역의 한인 이주는 크게 네 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로 토지는 일본 개척단이 소유하고, 그 토지를 임대하여 농사를 짓는 개척단[11개]이다. 이 개척단은 1942년 당시 총951호로 인구는 5,035명이었다. 두 번째는 일본인 개척단의 땅을 한인들이 임대하여 개척 조합을 만든 경우로 두가(杜家) 지역이다. 세 번째는 한인 분산 개척민들이 농장[15개]을 꾸린 경우이다. 이 농장은 최대 649호, 3,215명이었다. 네 번째는 조선 이주민이 꾸린 조선인 개척 조합으로 민락향 한인 마을이다.

위의 네 가지 유형 가운데 안가 농장은 농토 부동산 경영 회사인 ‘만몽 산업 주식 회사’가 기획 설계로 오상시유수시 경계의 ‘납림하(拉林河)’를 막아 개척한 것이다. 안가 농장이 설립된 오상현의 한인 마을도 1938년 대규모로 농장이 개척되면서 조선인 이주민들이 들어와서 형성되게 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안가 농장을 설립한 만몽 산업 주식 회사는 오상현 지역에 들어온 한인 개척 조합 가운데 하나이다. 이 회사는 개성의 실업가인 공진항이 설립한 것이다. 그는 개성 상인으로 부를 축적한 집안에서 태어나 프랑스·영국 등에서 유학하고 귀국하여 당시의 만주 개발 열풍에 편승해 만주에 토지를 구입하여 대규모 농장을 짓고 일반인들에게 유상으로 분양·경작시키는 사업가였다. 그는 개성에서 10여 명에게 50만원의 자본금을 모아 만주 지역에 농장을 만들어 경영하는 만몽 산업 주식 회사를 설립하였다.

이 회사는 1934년 길림성 공주령 평안에 고려 농장을 설립하였다. 하지만 이 농장은 일제가 정책적으로 만든 ‘일본 개척단’이 그 지역에 들어오면서 만주 척식 회사로 넘어가게 되었다. 회사는 그 대가로 한족 지주가 밭농사를 짓던 ‘안가 지역’의 토지를 분양받아 새롭게 농장을 개척하게 되었다.

안가 지역은 지세가 평탄하고 토양이 비옥하며 라림하 등의 강이 인접해 있고 강수량도 많아 수전 개발에 유리한 지형이었다. 또한 안가역(安家驛)이 있어 교통이 편리해 대규모 농장을 개척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이 시기 남만지역의 한인들이 일제의 탄압을 피해 북만으로 이동하는 경우가 증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유리한 조건을 바탕으로 만몽 산업 주식 회사는 1938년 겨울부터 라림하를 막고 농장 개척을 시작하였다. 회사는 19.5㎞ 길이의 홍수 방지 둑의 건설, 총길이 3만 5,058m의 16개 관수로·4갈래 33.3㎞의 배수로 등의 관계 수리 시설 정비, 각 3상[垧, ha] 크기[논두렁 100m×300m 경계]의 ‘경작지 500호’ 설계 등의 과정을 거쳐, 농장을 건설하였다. 이 공사에는 연인원 3,000명이 동원되었고, 공사비 1만5,000원이 소요되었다.

이렇게 건설된 안가 농장 500호[개]의 토지는 각각 농민에게 10년을 기한으로 판매되었고, 이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유입되어 13개의 한인 거주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오상현[현재 오상시]의 민락조선족자치향은 ‘안가 농장’·‘500호 농장’ 등으로 불렸고, 당시 한인인 살던 13개 ‘둔(屯)’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 회사의 농장은 체계적으로 경영되었다. 대표는 공진항이었지만, 이선근이 안가 농장을 담당하였다. 회사에는 재무계· 측량계· 건축계· 교육계 등이 있었다. 이것은 현대의 대규모 공장 운영 시스템과 유사한 방식으로 생산과 소비, 교육, 노동력의 재생산이 농장에서 해결되는 ‘자본주의적 농업 산업화’ 체계였다. 이 체계는 농장 안에서 생활에 필요한 모든 것을 회사에서 제공하는 것이었다.

회사의 농장 운영은 먼저 토지[3상]를 농민에게 판매하여 소득을 올렸다. 다음으로 일시불로 토지를 구매하기 어려웠던 농민들에게 10년을 기한으로 매년 가을에 원금의 일부와 이자를 회수하여 이득을 얻었다. 또한 농장에 도정 공장을 두어 농민들에게 거둔 벼를 쌀로 가공하여 위만 정부와 관동군에게 판매하고 상당한 수익을 얻었다.

한편 봄에 식량이 부족한 농민들에게 조를 제공하거나, 농사철에 종자나 농기구를 대여하고 이익을 내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농장을 경형한 회사는 엄청난 수익을 올렸지만, 대부분의 농민들은 해방까지 빚을 절반도 갚지 못하였다.

이러한 운영 방식을 ‘자유제 자작농(自由制自作農)’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로 대부분이 농민들은 농장의 소작농과 다르지 않았다. 1945년 안가 농장에서 한인 가구의 8.3%만이 상중농 이상의 부유한 계층에 속했고, 나머지 91.7%는 하중농 이하의 빈곤한 생활을 하였다.

하지만 이 농장에서는 운영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을 회사에서 해결해 주었기 때문에 절대적인 빈곤에 허덕이지 않은 점은 있었다. 또한 회사가 만주국 정부나 관동군과 어느 정도 유착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역보다 일제의 직접 통제를 상대적으로 덜 받았다.

현황

안가 농장의 이주민들은 경상도 사람들 다수가 이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기 때문에 말투나 생활 양식이 경상도 식으로 동화되고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1926년 오상시의 한인은 262명이었지만, 농장이 운영된 이후 1944년에는 2,981명[560호]이나 되었다.

오상현에 정착한 이주민들은 교육열이 높았고, 만몽 산업 주식 회사는 농장의 안정적인 운영과 수전 농업 기술을 가진 노동력을 흡수하기 위해 이를 이용하고자 하였다. 1939년 농장의 개장과 함께 회사는 교육계를 설치하여 만락향 민안툰[왕가툰]에 ‘안가 대동 소학교’를 설립하고, 겨울부터 교육을 실시하였다.

처음에는 1학년 2개 반, 2·3학년 각 1개 반으로 총 200여 명이 학생이 있었고, 1941년까지 5개 학년에 8개 반으로 유지되었다. 이후 농장의 규모가 커지자 1941년에 1,200㎡의 ‘ㄱ’자형 교사를 신축하여, 1942년 2월부터 사용하였다. 이때 완전 소학교[우급 학교]로 승급되고, ‘오상현 공립 안가 대동 국민 우급 학교’로 명칭도 개정되었다. 하지만 교육은 위만 정부의 교육 정책과 규정에 따라 황민화 교육이 진행되었다.

한편 1941년 학교를 신축하면서 남게 된 원래의 학교 건물에는 ‘초중급 농사 학교’를 설립하여 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에게 농사 기술을 가르쳤다. 1943년에는 통학 거리가 먼 향가툰에 ‘동광(東光) 분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고, 일반 농민들을 대상으로 ‘문맹 퇴치’를 위한 야학도 운영하였다.

의의와 평가

일제 시기 수전 개발을 통한 식량 생산에 동원된 만몽 산업 주식 회사에 의해 농장 설립과 함께 만들어진 한인 마을이기는 하지만, 현재까지 마을 공동체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 김왕배, 이수철,「1930년대 만주의 조선족 마을 공동체-흑룡강성 오상현 조선족 마을 형성 과정을 중심으로-」(『동방 학지』144, 연세 대학교,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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