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舒蘭縣 戰鬪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 지역 | 길림성 길림시 서란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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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인물/단체 | 한국 독립군|중국 호로군|이청천|신숙|정초 |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32년 1월 |
| 발생|시작 장소 | 길림성 서란현 |
정의부·참의부·신민부 등의 3부 통합운동이 결렬된 후, 북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한족 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와 생육사(生育社)가 중심이 되어 1930년 7월 북만주 위하현(葦河縣)에서 조직된 한국 독립당(韓國獨立黨)은 당군(黨軍)으로 이청천을 사령관으로 하는 한국 독립군(韓國獨立軍)을 조직하였고, 이 지역의 합법기관인 한족 자치 연합회(韓族自治聯合會)를 지도 육성하면서 북만주지역을 무대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7월 한국 독립당은 중흥을 꾀하기 위해 동·북만주 일대의 옛 신민부(新民府) 진영 및 새로 수습된 대소단체의 대표들과 영안현(寧安縣)에서 대표자 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한국독립)군(軍)은 (한국 립당의)당군(黨軍)으로 편성하되, 전만주(全滿洲)를 15구(區)로 나누어 신병(新兵)을 모집하여 3개월의 할 것’이라는 내용을 결의하였다.
9·18 사변이후 관동군·만주군과의 전투가 불가함을 인식하고 각 부(府)에 소속되어 있던 각 부대(部隊)를 총집합하고, 중국 호로군(護路軍) 사령관 겸 길림성 자위대 총지휘관(吉林省自衛隊總指揮官)인 정초(丁超)와 협의하여 한·중 연합군을 조직하였다.
이때 한국 독립당에서 조직한 한국 독립군에는 총사령장관에 이청천(李靑天), 부사령장관에 남대관(南大觀), 참모장에 신숙(申肅), 의용군 훈련대장에 이광운(李光雲) 등이 임명되었다. 이후 한국 독립당은 1931년 11월 2일 길림성 오상현(五常縣) 대석하자(大石河子)에서 중앙회의를 개최하고, ‘각 군구(軍區, 1931년 36구로 확대)에 총동원을 내려 군사행동을 개시할 것, 당내 공작을 군사방면에 집중할 것, 특파원을 길림성 항일당국에 파견하여 한·중 합작을 상의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후 한국독립군은 12월에 신숙·남대관을 호로군 연합군총부에 대표로 파견하여 총사령관 정초 등과 상의하게 하였다. 그 결과 12월 11일 총사령 이청천이 호로군총부에 도착하여 한·중 연합에 관하여 ‘한·중 양군의 장기항전, 중동철도(中東鐵道)를 경계로 서부전선은 중국군·동부전선은 한국 독립군이 담당할 것, 병사 훈련은 한국 장교가 담당하고 중국군은 자료를 제공할 것’ 등을 약속하였다. 이로써 한국독립군은 총사령부를 의란현(依蘭縣, 현재 三姓縣)에 정하고, 군대를 집중적으로 훈련하였다.
1932년 1월 한국 독립군과 중국 의용군은 서란현(舒蘭縣)을 공격하기로 하였다. 중국군은 자정에 현성(縣城)을 동·서·남 3방면으로 포위 공격하기로 하고, 한국 독립군은 북문 밖 20리 되는 산골짜기 길 양편에서 매복하면서 적의 퇴로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당시 서란현성에는 일본군 1분대·만군(滿軍) 1중대 정도가 있었다.
전투는 성내에서 시작되어 2시간 정도 진행되다가 멈추었고, 곧이어 일본군의 퇴각이 이어졌다. 일본군이 퇴로는 한국 독립군이 매복하고 있는 방면이었다. 약 30분정도 후 일본군이 한국독립군의 매복 장소에 도착하자, 한국 독립군은 일제히 사격을 개시하면서 수류탄으로 적을 공격하였다. 일본군은 기관총과 소총으로 대항하였지만, 곧바로 도주하였다. 이 전투로 인하여 일본군은 큰 타격을 받았다.
한국 독립군은 현성에서 2일간 휴식을 취하고 액목현(額穆縣) 방면으로 진행하던 중에 노부령(老爺嶺) 부근에서 일·만군 2개 대대와 조우하여 약 3시간 동안 교전하였다. 한국 독립군은 도주하는 척하면서 5곳의 주변의 높은 지형을 점령하고 적군을 유인하였다. 뒤따라 오던 만군 500여 명은 한국 독립군의 맹렬한 공격으로 진퇴양난에 빠져 항복하였고, 약 200여 명은 사상되었다. 나머지 100여 명의 패잔병들은 탈출하였다.
2월 초순에는 한중 연합군이 액목현성 서북·서남 두길로 나누어 진군하였다. 이때는 음력 설을 맞이하는 시기로 성내의 만군 200여 명은 전망초소에 몇 명의 보초만을 배치하고 향연에 빠져 혼미한 상태였다. 이에 한중 연합군이 적군을 공격하였고, 적들은 대응도 하지 못하고 경박호(鏡泊湖)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이에 연합군은 10리까지 적을 추격하여 많은 마필(馬匹)과 무기를 획득하고 돌아왔고, 약 50일간 현성에서 머무르며 훈련을 하였다.
서란현의 전투 후 아침에 전투현장을 확인해 보니, 일·만군의 사상자는 150여 명이었다. 노획품은 소총 120정, 탄환 8천발, 박격포 2문, 포탄 상자 22개, 망원경 3개, 경기관총 2정, 피복 100벌, 군마 5필, 화폐지 길대양(吉大洋) 200만원 등이었다. 이틀뒤에 있었던 노부령(老爺嶺) 부근의 전투에서는 만군 200여 명 사상, 500여 명을 포로로 잡았다.
삼부 통일 회의(三府統一會議)가 결렬된 후 신민부의 일부는 한족 총연합회를 조직하였고, 주석인 김좌진이 순국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과 함께 한국 독립당을 설립하고 한국 독립군을 조직하였다. 한국 독립군은 서란현 전투를 시작으로 4년여 동안 쌍성보(雙城堡) 전투·사도하자(四道河子) 전투·동경성(東京城) 전투·대전자령(大甸子嶺) 전투 등에서 다른 무장단체보다 더 많은 전공을 거두었다.
한편 1930년대 만주에서는 한국 독립군과 ‘국민부(國民府)’의 ‘조선 혁명군(朝鮮革命軍)’이 당시 국제적인 정세에 따라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