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瑞甸書塾 |
|---|---|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 |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학교 |
|---|---|
| 설립자 | 이상설 |
| 개교 시기/일시 | 1907년 |
| 폐교 시기/일시 | 1908년 8월 20일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7년 4월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07년 8월 |
| 최초 설립지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에 설립되었던 민족 교육 기관.
1905년(광무 9) 을사 조약이 체결되자, 이듬해 4월[음] 만주로 망명한 이상설(李相卨)은 여조현(呂祖鉉)·정순만(鄭淳萬)·이동녕(李東寧)·박정서(朴禎瑞)·김우용(金禹鏞)·황달영(黃達永)·홍창섭(洪昌燮)·유완무(柳完懋)·장유순(張裕淳)·이시영(李始榮)등의 애국 지사들과 함께 교육을 통한 독립 사상의 고취를 위하여 연길현 육도구(六道溝) 용정촌에 설립하였다.
용정촌을 주목한 이유는 많은 한인들이 이주하여 교육하기 적당한 곳이었고, 러시아와 인접하여 외교가 편리하고, 한국과 가까워 독립운동 기지로 적당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상설은 용정 천주교 회장 최병익(崔秉翼)의 집을 사재로 매입하여 수리후 학교를 세우고, 용정 일대의 서전 평야에서 이름을 따와 서전서숙이라고 하였다.
1907년 4월 이상설이 이동녕·정순만과 함께 헤이그의 만국 평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게 되자 재정난을 겪게 되었고, 또한 1907년 8월 용정에 조선 통감부 간도 출장소가 설치되어 일제의 감시와 방해가 심해지자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폐교의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당시 통감부 출장소 소장 사이또 스에지로[齋藤季次郞]는 흉계를 감춘채 회유책으로 매월 20원씩의 보조금을 내겠으니 서숙을 계속 운영할 것을 제안하였다. 이를 일축한 학교 측은 문을 닫고 혼춘(琿春) 방면으로 떠났다가 갑반 학생들만 데려다 탑두구(塔頭溝) 근처에서 수업을 계속하여 졸업식을 올린 뒤 해산하고 말았다. 사이또는 서전서숙을 사들여 그 자리에 일본인 간도 보통학교를 세웠다. 서전서숙의 교육 정신은 이후 명동 서숙으로 계승되었다.
건물 면적은 70여 평[231㎡ 남짓] 정도였으며, 숙장은 이상설이, 운영은 이동녕·정순만 등이 맡아보았으며, 교사는 이상설·여조현·김우용·황달영 등이었다. 운영 자금 및 유지 경비는 이상설 등 참여 인사들 자체 내에서 조달하였다. 교재와 학생의 필수품, 수업료 등 모든 것이 무상이었다.
학생 모집을 위해 참여 인사들이 집집마다 방문한 결과 개교는 학생 22명으로 출발하였다. 설립 초기에는 고등반인 갑반과 초등반인 을반으로 나누었으며, 학생 수가 늘면서 갑반에 20명, 을반에 20명, 병반에 34명으로 분반하여 교육을 실시하였다.
교과목은 신학문을 가르쳤는데, 철저한 반일 민족 교육, 애국 독립 사상에 초점을 두었다. 이상설은 『산술 신서(算術新書)』 상·하권을 저술하여 가르쳤으며, 정치·지리에 황달영, 산술에 김우용, 법률·경제대의에 여조현이 각각 담당하였다. 역사·한문은 이동녕이 가르쳤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해지는 학생들의 명단을 보면 갑반에 윤정희(尹政熙)·이병휘(李丙徽)·윤규한(尹圭漢)·김정문(金鼎汶)·남세극(南世極)·채우석(蔡禹錫)·이근용(李瑾鎔)·구자승(具滋昇)·구정서(具貞書), 을반에 김학연(金學淵)·박일병(朴一秉)·오병묵(吳秉默)·이정휘(李庭徽)·박효언(朴孝彦)·구자익(具滋益)·박세호(朴世豪) 등이 있었고, 소속을 알 수 없는 남위언(南葦彦) 등이 있었다.
폐교 후 서전 서숙 학생이었던 김학연은 명동 서숙(明東書塾)에서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오병묵은 창동 학교(昌東學校)의 교장을 지냈다. 남세극은 간민 자치회(墾民自治會) 등의 항일 독립운동 조직에 영향을 끼쳤다.
이 밖에 간도[밀산부]·연해주 지역의 한민 학교(韓民學校) 등은 모두 서전서숙의 교육 정신을 이어나간 교육 기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