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 투쟁

한자 秋收 鬪爭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사건|추수 투쟁
관련인물/단체 중국 공산당 동만 특별위원회|조선 인민회|
발생|시작 시기/일시 1931년 가을
발생|시작 장소 길림성 연길현 노두구, 팔도구, 개산툰구 등
정의

1931년 가을 동만 지역 등의 농촌 지역에서 소작료와 이자를 인하하기 위해 전개된 투쟁.

역사적 배경

1930년 5·30 폭동 이후 1931년 초까지 농민들의 폭동과 투쟁이 계속되자, 1931년 3월 길림성 정부는 4·6 및 3·7의 소작료 인하 법령을 발표하였다. 하지만 지주들은 이를 거부하고 부패한 중국 관헌 및 일제와 결탁하여 농민들을 탄압하려 하자 광범위한 농민들의 반반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중공 동만 특위에서는 1931년 8월 일제가 만주 사변을 도발하자 일제타도, 4·6, 3·7제 소작료 인하의 실시와 조선 인민회(朝鮮人民會) 등의 박멸을 요구하는 구호를 제기하였으며, 동양 척식 주식 회사의 빚을 갚지 말자는 등의 구호를 제기하여 농민들의 지지를 이끌었다.

경과

1931년 9월 연길현 노두구(老頭溝) 부근의 관도구·대기동 등지에서 800여 명의 농민들이 최초로 추수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중국 공산당 노두구위원회의 지도하에 지주의 장원을 포위하고 양식 창고를 열어 소작농에게 나누어주었다.

1931년 11월에는 팔도구 부분에서도 추수 투쟁이 전개되었으며, 가을에는 화룡현 농민협회 회장 구성태와 중국 공산당 개산툰구 위원회의 지도하에 개산둔 부근의 자동·삼동포·천평후동·학성 등지에서도 추수 투쟁이 진행되었다. 이밖에 연길의 소영자를 비롯하여, 왕청현에서는 백초구·대왕청·소왕청·석현에서, 훈춘현에서는 밀강·경신지구 등에서도 추수 투쟁이 전개되었다.

의의와 평가

추수 투쟁은 처음에는 지주에 대한 소작료 이하 및 이자 인하 요구, 채무 변재 등과 같은 온건한 형태가 주류를 이루었으나 점차 지주의 식량을 빼앗아 공동 분배하는 등 보다 급진적인 형태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동척(東拓)에 대한 채무를 거부하는 등 항일 투쟁적 성격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추수투쟁은 소작료 인하를 어느 정도 달성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농민들을 고무시켰다. 이 과정에서 농민들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이 확대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김동화·김철수·이창역·오기송 편 『연변 당사 사건과 인물』(연변인민출판사, 1988)
  • 조선족 약사 편찬조 지음, 『조선족 약사』(백산 서당, 1989)
  • 최성춘 주필, 『연변 인민 항일 투쟁사』(민족 출판사, 북경, 1999)
  • 장세윤, 「1930년대 초 간도 지방에서의 한인 봉기」(『동북아 질서의 형성과 변동』한국 정치 외교 학회,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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