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靑林敎 事件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신종교에 의한 항일 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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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인물/단체 | 임창세|청림교 |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44년 6월 |
| 발생|시작 장소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대포산 |
1944년 6월 청림교 신도 50여 명이 길림성 용정에 있는 대포산에 올라 일제의 패망을 기원하는 기도제를 올린 사건.
청림교가 만주 지역에서 포교를 시작한 것은 1910년대였으며, 주로 용정과 두도구, 삼도구 일대를 중심으로 교세를 확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연변에서는 한때 한오가 교주가 되어 청림교의 포교 활동을 전개하였으나 풍속 개량, 교육 진흥, 생산 발전 등을 주장하며 교단을 친일적인 방향으로 이끌기도 하였다.
그러나 1921년 2월 임창세, 현기정, 임방혁 등이 청림교의 친일적 노선에 반기를 들고 대성 유교를 표방하였다가 1925년 경에는 단군 신앙을 수용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28년에는 현기정을 국내로 파견하여 고종의 초상을 가져오게 하여 그해 12월 용정 남쪽에 있는 합성리에 영모전을 세우고 단군 시위와 고종의 초상을 모시고 매월 제사를 지냈다.
이밖에 청림교에서는 재만 한인의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는데 1919년 용정에서 3·13 만세 운동이 발발하자 이에 참여하였으며, 이후 김좌진·이청천 및 야단(野團) 등과 관련을 맺으며 항일 무장 투쟁을 지원하고자 노력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1920년에는 임창세와 신도 석화준이 중학교 설립을 발기했으며, 많은 신도들과 지방 유지들이 호응하여 1921년 7월 11일 대성 중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학감은 강훈이 맡았으며, 경제 후원 책임으로는 현기정, 교무 주임을 임태규 등이 담당하였다. 초기 학교에서는 사서 오경과 명심 보감 등을 중심으로 유교의 교리를 가르치는데 힘쓰기도 하였다. 이밖에 청림교에서는 4년제 명신 소학교와 무산 아동 학교 등을 세우고 조선 역사와 지리 등을 가르치면서 민족 의식 고취에 힘을 기울였다.
청림교 사건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일제의 강제 징병 및 검속·근로 봉사 등의 강요가 지속되자 교주 임창세가 이를 적극적으로 비판하면서 시작되었다. 임창세는 일제의 정책을 비판하면서 민족의 독립을 위해 싸울 것을 주장하면서 뜻있는 사람들을 청림교에 가입시켰으며, 새로 가입한 신도들은 “조선 개국 선왕님과 애국 충신들의 뜻을 이어 목숨 바쳐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우겠습니다.”라고 선서하였다. 이후 임창세는 1944년 6월 50여 명의 신도들과 함께 용정 남쪽에 있는 대포산에 올라 일제의 패전을 기원하는 기도제를 지냈으며, 교도들에게 각각 기도 운동을 펼칠 것을 호소하였다.
기도제 이후 임창세의 호소에 호응하는 사람들이 3,000명에 달하였는데 사건이 발생하자 1944년부터 1945년까지 110명의 청림교도들이 일제에 의해 검거되는 대대적인 탄압을 받았다.
청림교 사건은 만주지역에서 민족주의적 성격을 갖고 활동했던 신종교가 일제 말기에 이르러서도 강력한 민족 의식을 견지하고 이를 실천하고자 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