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덕해

한자 朱德海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인물(일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인물
성별
대표경력 연안 조선 청년 군정 학교 교무 위원 및 총무 처장, 조선 의용군 제3 지대 정치 위원, 연변대학 교장, 중국 공산당 연변 지구 위원회 제1 서기, 길림성 인민 정부 위원,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 주석, 길림성 부성장, 길림성 위원회 상무 위원, 전국 인민 대표 대회 제3기 민족 위원회 부주임
출생 시기/일시 1911년 3월 5일
수학 시기/일시 1920년 3월
활동 시기/일시 1927년
활동 시기/일시 1931년 5월
활동 시기/일시 1939년 9월
활동 시기/일시 1943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10월
활동 시기/일시 1949년 9월
몰년 시기/일시 1972년 7월 3일
추모 시기/일시 1978년 6월 20일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20년 3월
출생지 러시아연해주 우스리스크 부근 동쌍성자
거주|이주지 함경북도 회령
거주|이주지 길림성 화룡현 지신향 승지촌
학교|수학지 길림성 화룡현 지신향 승지촌
학교|수학지 러시아모스코바
활동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묘소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
정의

일제 강점기 중국 지역 항일 운동가이자 조선족을 대표하는 정치가.

가계

1911년 3월 5일 러시아연해주 우수리스크 부근 산촌인 동쌍성자(東雙城子) 도별하촌(道別河村)의 빈농가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오기섭(吳基涉)이며 1934년 주덕해(朱德海)로 개명하였다. 오영일(吳永一)·김도훈(金道訓)·오동원(吳東元) 등으로도 불렸다.

부모의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군(會寧郡) 팔을면(八乙面)이었다. 1918년 부친 오세우(吳世寓)가 피살되자 고향인 회령으로 갔다가, 1920년 3월 길림성(吉林省) 화룡현(和龍縣) 지신향(智新鄕) 승지촌(勝地村)으로 이주하여 어렵게 생활했다. 그해에 화룡현 공립 제14 소학교에 입학하여 1923년 겨울에 졸업하였다.

활동 사항

1927년부터 소학교 교장이었던 김근(金根)으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배웠으며, 그해에 고려 공산 청년 동맹에 가입하였다. 1930년 3월 김근의 가족과 함께 흑룡강성 영안현(寧安縣) 화검구(花瞼構)로 이주하여 4개의 조선인 집단 농장을 설립하였다. 그해 8월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하여 화검구 지부 서기가 되었다. 그해 10월 러시아 혁명 기념일을 맞아 항일 봉기를 준비하다가 일제 경찰에 발각되어 남호두(南湖頭)로 이주하였다.

1931년 5월 동경성(東京城)에서 중국 공산당에 들어간 후 흑룡강성(黑龍江省)영안·밀산(密山)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31년 9월 18일 일제의 만주 침략 후 적극적인 항일 투쟁에 참가하였다. 1932넌 1월 동경성(東京城) 우가둔 공청단 특별 지부 서기가 되었다. 1933년 3월 자목합자 당지부의 서기가 되어 친일적 성격의 조선인 민회(民會) 반대 투쟁을 조직하였다. 그해 8월 중국 공산당서대림자(西大林子) 지부 서기가 되었다. 1935년 3월 동북 인민 혁명군 제4군 제1사에 들어갔으나 병에 걸려 요양 생활을 하였다.

1937년 4월 모스크바 동방 노력자 공산 대학에 입학하여 1938년 여름 졸업하였다. 1939년 9월 연안(延安)으로 가서 팔로군(八路軍) 제 359여단 제8 연대 특무중대 지도원, 제8 연대 공급처 지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항일 군정 대학(抗日軍政大學) 동간대(東干隊)와 중앙 해외 연구반에서 학습하였다. 1943년 연안의 조선 청년 군정 학교 설립에 참여하여 교무 위원과 총무 처장을 역임하였다.

1945년 8.15 이후 10월에 만주의 심양(瀋陽)으로 와서 조선 의용군 제3 지대를 설립하고 정치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46년 상지현(尙志縣)에 8·15 이후 최초로 조선족을 위한 중학교를 세웠다. 1947년 동북 행정 위원회 설립에 참여하였다. 1948년 4월 민족 사무 처장이 되어 『민주 일보』를 창간하고 문공대(文工隊)를 조직하였다.

1949년 연변대학(延邊大學校)를 설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그 해 3월 중국 공산당 연변 지구 위원회 제1 서기가 되었다. 그 해 6월 북경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을 협상하기 위해 개최된 전국 정치 협상회 준비 회의에 조선족을 대표하여 참석하였으며, 9월 전국 정치 협상 회의 제1기 전국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50년 4월 5일 길림성 제1차 인민 대표 회의에서 성 인민 정부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그 해 6월 한국 전쟁이 일어나자, 9월에 연변 지구의 방공 사업 강화를 위해 조직된 연변 방공 위원회에서 주임으로 활동하였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성립될 때 주 정부 주석이 되었다. 1954년 길림성 부성장(副省長), 길림성 위원회 상무 위원이 되었으며, 1956년 12월 전국 인민 대표 대회 제3기 민족 위원회 부주임으로 선출되었다.

1957년 조선족 예술인 양성을 위해 연변 예술 학교를 세우는 등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를 내세운 중국 중앙 정부의 협애한 민족주의에 반대하여 민족 문화 교육에 노력하였다. 이러한 활동이 문제시되어 ‘지방 민족주의 분자’라는 낙인이 찍혀 문화 대혁명 기간 중 임표(林彪)·강청(江靑) 등으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이후 주은래(周恩來) 총리의 도움으로 1969년 10월 호북성(湖北省) 53농장으로 피신하여 생활하였다. 1972년 7월 3일 무한(武漢)에서 61세로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이후 복권되어 1978년 6월 20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위원회에서 정식으로 명예 회복이 되어 연길시 인민 공원에 안치되었다. 1986년 7월 3일 서거 14돌을 기념해 연길시 인민 공원에 20m 높이의 기념비가 세워졌다. 중국 공산당 중앙 위원회 총서기인 호요방(胡耀邦)이 건립을 지시하고 직접 비명을 썼다고 한다. 주덕해가 이주해 자란 용정시 지신진 승지촌의 옛 집터 앞에 전신 동상이 세워졌으며, 2012년에는 연길시 아리랑 광장에도 동상이 건립되었다.

참고문헌
  • 강창록, 『주덕해』(실천 문학사, 1992)
  • 全國 中國 共産黨史 人物 硏究會 編,『中共黨 人物傳』17(陝西 人民 出版社, 1984)
  • 김동화 등 편저, 『연변당사 사건과 인물』(연변인민출판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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