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朝鮮人 民會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친일 조선인 단체 |
|---|---|
| 설립자 | 만주 지역 일본 영사관 |
| 설립 시기/일시 | 1911년 |
| 해체 시기/일시 | 1931년 10월 |
| 최초 설립지 | 만주 지역 |
만주 지역 전역에서 1911년 이후 조직된 조선인 친일 단체.
조선인 민회의 활동은 주로 구역 내 거주하는 한인에 대한 인구 조사, 한인 사회 내부의 동향 파악, 농작물 경작과 수확 상황, 중국인 지주와의 관계, 세금 납부 상황 등을 조사하여 일본 영사관에 수시로 정보를 제공하는 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교육과 위생 및 구제 활동과 관련해서는 조선 총독부의 보조금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이들 학교에서는 조선 총독부가 발행하는 교재를 사용하는 등의 식민지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전체적으로 일본 영사관의 지휘·감독을 받는 ‘사정 보조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인 민회의 임원은 일본 영사관의 주도로 조직된 ‘조선 시찰단원’으로 선발되어 평양·서울·개성·수원·대구 등을 시찰하며 융숭한 대접과 함께 식민 통치의 성과를 견학하고 이를 국내외에서 선전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조직 체계는 관할구역의 규모에 따라 본부 체제와 산하의 지부체제로 이루어졌다. 본부의 임원은 회장, 부회장, 평의원, 총무[서기]로 구성되고 지부에는 구장, 총대, 분회장 등을 두었다. 간도 지역의 경우 모두 18개 지역에 조직이 결성되어 있었으며, 입회는 반강제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용정촌(龍井村)에서 최초로 설립된 이래, 1915년 백초구(百草溝), 1917년 두도구(頭道溝)와 훈춘(琿春), 1918년에는 국자가(局子街)에 조직되었으며, 1921년에는 연길현(延吉縣)의 동불사(銅佛寺)·천보산(天寶山)·걸만동(傑滿洞), 화룡현(和龍縣)의 남양평(南陽坪)·부동(釜洞), 왕청현(汪淸縣)의 양수천자(凉水泉子), 훈춘현의 흑정자(黑頂子) 등에 한꺼번에 조직이 결성되기도 하였다. 남만의 경우는 1913년부터 조직이 결성되어 1926년까지 13개의 조직이 결성되었다.
이들의 친일 활동이 계속되자 상해 임시 정부에서 발행하는 『독립 신문』에서는 봉천과 장춘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민회의 간부들에 대해 ‘적견(敵犬)’으로 간주하고 ‘7가살(七可殺)’에 포함시켜 그 명단을 발표하였으며, 안동 조선인 민회의 지부가 설치되었던 관전현과 장백현 등에서는 48명에 달하는 전·현직 간부들이 독립운동 세력에 의해 처단되거나 구속되기도 하였다. 북만에서는 1928년 경 신민부에 의해 해림(海林) 지역 초대 조선인 민회 회장이었던 배두산(裵斗山)이 처형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