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柳麟錫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인물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13도 의군 도총재 |
| 출생 시기/일시 | 1842년 1월 27일 |
| 활동 시기/일시 | 1866년 9월 |
| 활동 시기/일시 | 1895년 12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5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4년 3월 |
| 몰년 시기/일시 | 1915. 1.29 |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 출생지 | 강원도 춘천부 남면 가정리(柯亭里)우계(愚溪) |
| 거주|이주지 | 길림성 통화현 오도구 |
| 거주|이주지 | 길림성 통화현 팔왕동 |
조선 말기의 위정척사론자(衛正斥邪論者)·의병장(義兵長).
강원도 춘천부 남면 가정리(柯亭里)우계(愚溪)에서 태어났으며, 가정리는 고흥 유씨 일족의 집성촌(集姓村)이었다. 아버지는 중곤(重坤)이며, 어머니 고령 신씨(高靈申氏)의 3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859년 여흥 민씨인 군수 민종호의 딸과 혼인하였다.
1866년 9월 병인 양요가 일어나자 척사 상소를 올리러 한양(漢陽)으로 올라가는 이항로(李恒老)를 수행 하였으며, 1868년 이항로가 사망하자 김평묵(金平黙)과 유중교(柳重敎)에게 배웠다.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때에는 강원도와 경기도의 유생 46명과 함께 척양소(斥洋疏)를 올려 개항에 반대 하였다.
1895년 12월 을미 사변(乙未事變)과 단발령(斷髮令)을 계기로 이필희(李弼熙)·서상렬(徐相烈) 등과 함께 ‘복수보형(復讐保形)’의 기치 아래 의병 항전을 시작하였다. 1896년 4월 제천 남산성 전투에서 관군에게 패하자 청나라의 군사적 원조를 기대하고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갔으나 회인현재(懷仁縣宰) 서본우(徐本愚)에게 무장해제를 당하자 7월 혼강(渾江)에서 의병을 해산 하였다.
의병 해산 후에는 한인(韓人)이 많이 살고 있던 통화현(通化縣) 오도구(五道溝)에 정착하며, 1898년 10월에는 부근의 팔왕동(八王洞)으로 재차 이주하였다. 1900년 여러 성현의 영정을 봉사(奉祠)하는 성묘(聖廟)를 세우는 등 유교 문화 보존 운동을 전개하였고 한인들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향약(鄕約)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1907년에는 고종으로부터 의병을 일으키라는 밀지(密旨)와 밀부(密符)를 받았으며, 1908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1910년 5월 지신허(地新墟)에서 13도 의군 도총재에 추대되었고 7월에는 성명회(聲明會)의 회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외교적 간섭이 강화되어 독립운동이 한계에 부딪치자 모든 지사(志士)와 사우(士友)들은 국내에 머물지 말고 간도(間島)로 건너와 함께 수의(守義)하여야 한다고 하며 ‘수화종신(守華終身)’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914년 3월 서간도로 이주하여 요령성 서풍현(西豊縣)에 이르렀으며, 8월에 관전현(寬甸縣) 방취구(芳翠溝)로 옮겼으며, 1915년 74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그의 문인들에 의해 1902년에는 『소의신편(昭義新編)』이, 1917년에는 『의암집(毅菴集)』이 간행되었다.
강원도 춘천시 남면(南面) 가정리(柯亭里)에 소재해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