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楊林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인물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홍군 제15 군단 75사의 참모장 |
| 출생 시기/일시 | 1898년 |
| 수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10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30년 10월 |
| 활동 시기/일시 | 1934년 7월 22일 |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10월 |
| 몰년 시기/일시 | 1936년 2월 22일 |
| 출생지 | 평안북도 |
| 거주|이주지 | 길림성 통화현 합니하 |
| 학교|수학지 | 길림성 통화현 합니하 |
| 학교|수학지 | 운남성 곤명 |
| 학교|수학지 | 러시아모스코바 |
| 활동지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
일제 강점기 중국 공산당 동만특위 위원 겸 군사위원회 서기, 중앙 군사위원회 간부 참모장 등을 역임한 조선인 공산주의자.
1898년 평안북도에서 출생하였으며, 부친은 3·1 운동 참가하여 시위 도중 순국하였다. 부인은 이추악(李秋岳)이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아버지와 함께 참가하였으며, 시위 도중 부친은 일제의 탄압으로 사망하였다. 1919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길림성 통화현 합니하(哈泥河)에 있던 신흥 무관 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학하여 군사학을 배웠다.
1920년 10월 청산리 대첩(靑山里大捷)에 참가하여 백운평(白雲坪) 전투 등에서 일본군을 섬멸하였다. 1921년 운남 강무 학교에 입포병과 16기로 입교하여 1923년 말 졸업하였다.
1925년 2월 중국의 광둥(廣東) 정부가 전개한 제1차 동정(東征)에 참여하였으며, 5월에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7년 8월 중국 공산당의 파견으로 모스코바에 유학하였으며, 1930년 봄 상해(上海)로 돌아왔다.
1930년 10월 중국 공산당 동만 특별 위원회 위원 겸 군사위원회 서기의 신분으로 연변(延邊)에 파견되었으며 1932년 늦가을까지 농민 봉기와 항일 무장 투쟁 등을 적극적으로 지도하였다. 당시 양림은 1932년 4월 동만 특별 위원회 순시원 자격으로 반석 지구(磐石地區)에 들어가서 이홍광과 함께 반석 노농 의용군(磐石勞農義勇軍)을 결성하였다.
1933년 1월 중국 공산당의 명령에 따라 강서 소비에트로 돌아왔으며, 1934년 1월 전국 소비에트 제2차 대회에 참가하여 주석단(主席團)의 일원으로 선출되었다. 1934년 10월 홍군(紅軍)의 장정(長征)이 시작되자 홍군 간부단 참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35년 10월 홍군 제15군단 제75사의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36년 2월 22일 홍군의 황하(黃河) 도하 선봉대를 지휘하여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나 심한 중상을 입고 전사하였다.
1934년 7월 22일 홍중사(紅中社)를 통해 「홍군 북상 항일 옹호 선언」을 발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