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한자 安昌浩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길림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인물
성별
대표경력 대한 민국 임시 정부 내무 총장 겸 국무 총리 대리
출생 시기/일시 1878. 11. 9.
수학 시기/일시 1895년
활동 시기/일시 1897년
활동 시기/일시 1907년
활동 시기/일시 1910년
활동 시기/일시 1919년
활동 시기/일시 1924년
활동 시기/일시 1926년
활동 시기/일시 1932년 4월
활동 시기/일시 1937년 6월
몰년 시기/일시 1938. 3. 10
추모 시기/일시 1962년
출생지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草里面) 칠리(七里)
거주|이주지 서울
거주|이주지 산동성 청도
학교|수학지 언더우드(UNderwood,H.G.)가 경영하는 구세 학당(救世 學堂)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
정의

일제 강점기 신민회·흥사단·상해 임시 정부 등을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가계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칠리(草里面七里)봉상도(鳳翔島)에서 출생하였으며, 순흥 안씨(順興安氏) 25대손인 아버지 안흥국(安興國)과 어머니 제안 황씨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큰형은 안치호(安致鎬), 둘째 형은 일찍 사망하였으며, 누이는 안신호(安信鎬)이다. 호는 도산(島山)이며, 필명은 산옹(山翁), 섬메, 신도생(新島生) 등을 사용하였다.

활동 사항

어려서 한학을 배웠으며, 1895년 상경하여 언더우드(H. G. Underwood)가 경영하는 구세 학당(救世學堂)에 입학하여, 3년간 수학하면서 기독교인이 되었고 서구 문물을 접하게 되었다. 1897년 독립 협회(獨立協會)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00년미국으로 건너가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인 친목회를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하여 대한인 공립 협회(大韓人共立協會)를 설립하고 『공립 신보(共立新報)』를 발행하여 교포들의 생활 향상 및 의식 계몽에 힘썼다. 1907년 귀국하여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고 국민 계몽에 힘썼다.

1907년 평양에 대성 학교(大成學校)를 설립하고 평양과 대구에 출판 기관인 태극 서관(太極書館)을 건립하였으며, 평양에 도자기 회사를 설립하여 민족 산업 육성에도 힘썼다. 1909년에는 청년 학우회(靑年學友會)를 조직하여 민족 계몽 운동 및 지도자 양성에 주력하였으며, 1909년 10월 안중근(安重根) 의거와 관련이 있다는 혐의로 3개월간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1910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산동성(山東省)에서 민족 지도자들과 ‘청도 회의(靑島會議)’를 열었다.

1911년 2월 7일에는 북만주 밀산(密山)의 개척지를 둘러보았으며, 이 지역에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김성무를 대리인으로 하여 토지를 매입하기도 하였다. 1919년 3·1 운동 직후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 내무 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을 맡아 독립운동 방략 작성, 연통제(聯通制) 수립, 각 지역 독립운동가의 상해 소집 등을 실행 하였다.

1924년에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각지를 순행하며 국민회와 흥사단의 조직을 강화하였으며, 1926년 중국에 돌아와서 만주 길림성 일대를 답사하여 이상촌 사업을 추진하였다. 1927년 1월 14일 만주 길림에 도착하여 경박호(鏡泊湖)와 동경성(東京城)을 답사하였으며, 27일에는 길림성 동대문 밖 대동 공사(大同公司)에서 ‘조선 독립운동의 과거와 현재’라는 제목으로 연설하였으며, 연설 도중 중국 경찰에 피체[길림 사건]되었으나 20일 만에 석방되었다.

이후 만주 각지를 순회하며, 대동 단결을 강조하는 연설을 하였다. 4월 1일에는 길림 사건의 현장인 대동 공사에서 재만 한인들의 안정을 위한 농민 호조사(農民互助社)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1931년에는 만주 사변이 발발하자 만주에서의 이상촌 계획을 단념하고 난징에서 토지를 매입하였다.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 의거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4년의 실형을 받고 6개월 만에 가출옥하여 지방 순회 후 평안남도대보산(大寶山)송태 산장(松苔山莊)에서 은거하였다. 1937년 6월 동우회 사건(同友會事件)으로 다시 일본 경찰에 붙잡혀 수감 중, 같은 해 12월에 병으로 보석되어 이듬해 3월 경성 대학 부속 병원에서 간경화증으로 사망하였다.

묘소

사망 후 망우리에 안장하였다가 1973년 11월 미국에 있던 부인 이혜련(李惠鍊)의 유해와 함께 도산 공원(島山公園)으로 이장,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 독립 유공자 협회, 『중국 동북 지역 한국 독립운동사』(집문당, 1995)
  • 이명화, 『도산 안창호의 독립운동과 통일 노선』(경인 문화사, 2002)
관련항목
관련 웹사이트
이전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