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申采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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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흑룡강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출생 시기/일시 | 1880년 12월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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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몰년 시기/일시 | 1936년 2월 21일 |
구한말·일제 강점기의 역사학자·언론인·독립운동가.
신채호의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 단생(丹生) 혹은 단재(丹齋)이다. 필명은 금협산인(錦頰山人)·무애생(無涯生)·열혈생(熱血生)·한놈·검심(劍心)·적심(赤心)·연시몽인(燕市夢人), 가명은 유맹원(劉孟源)이다.
신채호는 1880년 11월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에서 출생하였고 충청북도 청원에서 성장하였다. 신숙주(申叔舟)의 후예로 아버지는 신광식(申光植)이다. 할아버지는 과거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을 지낸 신성우(申星雨)이다. 배우자는 박자혜(朴慈惠)이다.
신채호는 어려서 할아버지에게 한학을 배워 10여 세에 『통감(通鑑)』과 사서삼경을 읽고 시문을 지을 정도로 남보다 뛰어났다. 그는 18세 때에는 전 학부대신 신기선(申箕善)의 사저에 드나들며 많은 책들을 접할 기회를 얻었고 그의 천거로 성균관에 입학한 뒤에 관장 이종원(李鍾元)의 총애를 받았다. 이때 그는 독립 협회 운동에 참여해 소장파로 활약하였으며, 22세 때에는 향리 부근인 인차리의 문동 학원(文東學院) 강사로서 신규식(申圭植) 등과 계몽 운동을 전개하였다.
신채호는 28세 무렵, 1907년 신민회에 참여하였으며, 국채 보상 운동에도 논설을 통하여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다. 그는 30세 되던 1909년에 신민회의 방계 조직인 청년 학우회의 취지서를 집필할 정도로 적극 참여하였다.
1910년 봄, 그는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 학교(五山學校)와 안동현(安東縣)을 거쳐 산둥 반도의 청도에 도착, 신민회의 동지들과 함께 ‘청도 회의’에 참석하였다. 그 뒤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건너가서 윤세복(尹世復)·이동휘·이갑 등과 광복회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1910년 12월 권업회가 창립되고 기관지 『권업 신문』이 창간되자 주필로 활약하였다.
1913년 그는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북만주 밀산을 거쳐 상해로 옮겨가 신규식 등이 국권 회복 운동을 위해 조직한 동제사(同濟社)에 참여하였다. 그 뒤 1919년 3·1 운동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발기하기 위한 임시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신채호는 1919년 6월 미국 위임 통치를 제안했던 이승만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임시 의정원과 결별했다. 이어 『신대한(新大韓)』이라는 주간 신문을 창간해 이승만의 위임 통치 청원과 독립운동의 외교 우선론 등 임시 정부의 정책을 비판했다.
신채호는 임시 정부와의 갈등으로 『신대한』 발간이 중단되자 북경으로 건너가, 1919년 9월 북경에서 교포 학생들을 규합해 결성한 항일 독립운동 단체인 대한 독립 청년단을 조직, 단장이 되었다.
1921년 1월 이후 신채호는 순한문 월간 잡지 『천고(天鼓)』에 간도에서 발생한 훈춘 사건[1920년] 이후의 현지 소식을 담은 「혼춘사건지휘보(渾春事件之彙報)」와 간도 참변에서의 「화룡현 거류 동포 피화 일람표(和龍縣居留同胞被禍一覽表)」 등을 작성, 보도하였다.
1922년 의열단 단장 김원봉(金元鳳)의 초청을 받아 다시 상해에 가서 1923년 1월 의열단의 독립운동 이념과 방략을 이론화해 천명한 선언서인 「조선 혁명 선언(朝鮮革命宣言)」을 집필하였다. 그는 「조선 혁명 선언」에서 의열단의 파괴 대상으로 조선 총독부·동양 척식 회사·매일 신보사, 각 경찰서 및 기타 왜적의 중요 기관으로 정하고 이를 ‘5파괴(五破壞)’라 하였다.
이어 그는 암살 대상으로 조선 총독과 고관, 일본 군부 수뇌·대만 총독·매국노·친일파 거두·적탐[敵探, 밀정] 및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등을 열거하고 이를 ‘7가살(七可殺)’이라 하였다.
1928년 4월 ‘무정부주의 동방 연맹 대회(無政府主義東方聯盟大會)’에 참석하는 등 본격적인 행동 투쟁에 나섰다. 그러던 중 1928년 5월 대만에서 ‘외국 위체 위조 사건’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대련으로 이송, 1930년 5월 대련 지방 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여순 감옥(旅順監獄)으로 이감, 복역 중 뇌출혈로 순국하였다.
신채호는 『독사신론(讀史新論)』·『조선 상고사(朝鮮上古史)』·『조선 상고 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조선사 연구초(朝鮮史硏究艸)』·『조선사론(朝鮮史論)』·『이탈리아 건국 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이순신전(李舜臣傳)』·『동국 거걸 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 등의 역사서를 집필했다.
신채호가 사망하자 그의 시신은 여순에서 화장했으며, 유해는 국내로 옮겨져 귀래리 고두미 옛 집터 뒷산에 매장되었다.
신채호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