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鳳梧洞 戰鬪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화룡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전투 |
|---|---|
| 관련인물/단체 | 홍범도|최진동|일본군 제19사단|대한 독립군|군무도독부군 |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20년 6월 6일 |
| 종결 시기/일시 | 1920년 6월 7일 |
| 발생|시작 장소 | 북간도 화룡현 월신강변 삼둔자 |
| 종결 장소 | 북간도 화룡현 봉오동 |
1920년 6월 7일 독립군이 화룡현(和龍縣) 봉오동 골짜기에서 일본군 1개 대대와 싸워 승리한 전투.
3·1 운동 이후 만주 지역 민족 진영의 항일 무장 투쟁에 대한 열정과 노력은 비약적으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상해 임시 정부의 통계에 따르면 1920년 3월 1일부터 6월초까지 독립군 부대의 국내 진입 작전은 32회였으며, 피해를 당한 일제 관공서와 경찰관 주재소가 34개소에 달하였다. 봉오동 전투는 이 같은 상황에서 독립군과 일본 정규군이 첫 번째로 충돌한 교전이었으며, 독립군이 대승을 거둔 전투였다.
1920년 6월 4일 대한 신민단(大韓新民團)의 박승길(朴承吉)이 지휘하는 독립군 1개 소대는 이날 새벽 5시경 두만강을 건너서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江陽洞)에 진입, 일본군 헌병 군조(軍曹) 복강(福江)이 인솔하는 헌병 순찰 소대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귀환한 전투가 있었다.
이에 일본군 남양(南陽) 수비대 대장 신미(新美) 중위는 1개 중대의 병력을 인솔하고 무단으로 두만강을 건너 박승길 소대를 추적하여 삼둔자(三屯子)에 이르렀으나 박승길 부대는 삼둔자의 서남방쪽에 매복하여 일본군 신미 중위의 1개 중대를 기다리고 있다가 6월 6일 밤 10시경에 이를 섬멸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것이 일본군이 처음으로 두만강을 건너서까지 독립군을 추격했다가 독립군에게 패전한 삼둔자 전투였다.
독립군과의 연이은 전투에서 패전한 일본군은 함경북도 나남에 사단 본부를 두고 있던 일본군 제19사단을 중심으로 월강 추격대를 편성하였으며, 안천(安川) 소좌가 인솔하는 1개 대대 병력이 독립군의 근거지의 하나였던 봉오동까지 찾아오게 되었다. 한편 일본군 월강 추격대가 봉오동을 향해 진격해 오자, 상황을 보고받은 홍범도(洪範圖)와 최진동(崔振東)은 봉오동에서 일본군을 섬멸하기로 결정하고 우선 마을 주민들에게 대피 명령을 내려 안전한 곳으로 피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한 후 구체적인 대응 작전에 돌입하였다.
우선 홍범도는 제1중대장 이천오(李千五)에게 중대원을 이끌고 봉오동 상촌 서북단에 매복하게 했으며, 제2중대장 강성모(姜尙模)는 동산(東山)에, 제3중대장 강시범(姜時範)은 북산에, 제4중대장 조권식(曺權植)은 서산 남단에 매복하도록 하였다. 이어 홍범도는 2개 중대를 이끌고 서북 북단에 매복하였으며, 군무국장 이원(李園)에게는 본부 병력 및 잔여 중대를 인솔하고 탄약 등을 공급하면서 만일의 경우 퇴로를 확보하도록 명령하였다.
또한 제2중대 제3소대의 이화일(李化日)에게는 약간의 병력을 주어 고려령(高麗嶺) 북쪽 고지에 대기하고 있다가 일본군이 나타나면 교전하는 척하면서 후퇴하여 일본군을 포위망 안으로 유인해 오도록 명령하였다. 대체로 홍범도는 일본군 본대가 봉오동에 매복해 있는 독립군의 포위망 안으로 들오면 일시에 총공격을 가하여 적을 격퇴하는 매복 작전을 구사하였다.
6월 7일 오후 1시경 일본군 척후병이 포위망 안에 도착했으나 독립군이 이를 통과시켜 주자 일본군 본대는 안심하고 독립군의 포위망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에 사령부장 홍범도의 공격 명령을 알리는 총성을 신호로 매복해 있던 독립군이 사방에서 집중적인 사격을 가하자 일본군도 신곡(神谷) 중대와 중서(中西) 중대를 전면에 내세워 기관총을 쏘며 필사적으로 저항하였으나 이미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던 독립군에게 밀려 막대한 피해를 당하였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의 대승으로 끝났는데 『독립 신문』 1920년 12월 25일자에 게재된 임시 정부 군무부의 발표에 의하면 일본군은 전사 157명, 중상 200여 명, 경상 100여 명을 내고 완전히 참패하였으며, 독립군 측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의 경미한 것이었다.
또한 중국 신문인 『상해 신보(上海新報)』 1920년 6월 27일자에서는 일본군이 한국 독립군에게 대패하여 일본군은 150명의 전사자와 수십 명의 부상자를 내었으며 독립군은 160정의 소총과 3정의 기관총을 노획했고 일본군은 이 전투 후 중국의 화룡현이 관할하는 흡강(洽江) 나루터의 통행을 폐쇄하고 있다고 보도하여 독립군의 승리를 확인해 주었다.
봉오동 전투는 홍범도 연합 부대의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대승이었으며, 이 전투를 통해 일본군은 독립군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책이 필요함을 절감하였으나 이는 청산리 대첩으로 이어져 또 한번 일본군이 대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