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金佐鎭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인물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대한 독립 군단 부총재|신민부 총사령관 |
| 출생 시기/일시 | 1889년 11월 24일(음력) |
| 활동 시기/일시 | 190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5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7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8년 11월(음력)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8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12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0년 10월 10일 |
| 활동 시기/일시 | 1925년 3월 |
| 몰년 시기/일시 | 1930년 1월 24일 |
| 추모 시기/일시 | 1962년 |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30년 1월 24일 |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930년 1월 27일 |
| 출생지 | 충청남도 홍성군 고도면 |
| 거주|이주지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
| 거주|이주지 | 흑룡강성 밀산 |
김좌진은 1889년 음력 11월 24일 충남 홍성군 고도면[현재의 갈산면] 행산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는 김형규(金衡圭)이고 어머니는 이윤식(李潤植)의 딸이다. 이들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난 김좌진은 자는 명여(明汝)이고 호는 백야(白冶)이다.
김좌진의 집안은 2,000석 가량의 재산을 소유하고 많은 노비를 거느린 홍성 지역의 부호였으며, 명문가였다. 또한 김좌진의 친형인 김경진(金景鎭)이 15촌 아저씨이며 판서를 지낸 김덕규(金德圭)에게 양자로 들어가면서 김좌진과 그의 집안은 사회적으로 보다 탄탄한 입지를 다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김덕규의 조부 김현근(金賢根)은 순조의 부마인 동녕위(東寧尉)였고 김현근의 조부 형질 등은 모두 공조 판서, 이조 판서, 대찬성, 형조 판서 등을 역임한 인물들이었다.
김좌진의 조상 가운데 주목할 만한 인물로는 김상용(金尙容)이 있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인조 반정 이후 대사헌, 형조 판서, 우의정을 지냈으며, 병자 호란 때 왕족을 호종하고 강화로 피난했다가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자결하였다. 「오륜가(五倫歌)」와 「훈계자손(訓戒子孫)」 등이 유명한데 김상용의 셋째 아들인 김광현(金光炫)의 10대손이 김좌진이다.
김좌진은 1905년 가노를 해방하고 1907년에는 고향인 홍성에서 호명 학교(湖明學校)를 설립하여 지방의 청년 자제들에게 신학문을 교육시키는 계몽 운동을 전개하며, 홍성에 대한 협회(大韓協會) 지부와 기호 흥학회(畿湖興學會)를 설립하여 활동하였다. 1908년에는 서울오성 학교(五星學校) 교감을 지냈으며, 청년 학우회(靑年學友會) 회원 및 한성 신보(漢城新報) 이사로도 활동하였다.
1910년에 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후에는 이창 양행(怡昌洋行)이란 무역 회사를 설립하여 독립운동의 기지로 삼았다. 1915년에는 박상진(朴尙鎭)이 주도한 대한 광복회(大韓光復會)에 참가하여 맹렬한 항일 활동과 군자금 모집 등에 주력하였으며, 일경에게 체포되어 서대문 감옥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17년 출옥, 만주로 망명하였다.
1918년 음력 11월 서일(徐一)·여준(呂準)·유동열(柳東說) 등과 함께 「무오 독립 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에 서명하였으며, 1919년 8월에는 정의단(正義團)을 개편하여 군정부로 개편하는 한편, 북로 사령부 제2연대장 겸 간북 총판국(墾北總瓣局) 재무참사(財務參事)로 일하였다. 이후 동년 12월 북로 군정서(北路軍政署)가 결성되자 총사령관으로서 서일을 보필하였으며, 왕청현 십리평(汪淸縣十里坪)에 사관 연성소(士官鍊成所)를 설치하고 독립군 간부를 양성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20년 10월 10월 일본군 대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목적으로 만주로 출병하자 소속 독립군을 백두산으로 이동시키던 도중 청산리(靑山里) 백운평(白雲坪)에서 일본군과 만나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후 갑산촌·어랑촌·천수평·고동하 전투 등에서도 연속적으로 일본군을 격파하여 청산리 독립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북진을 단행하여 북만주 밀산(密山)에 도착하였으며, 10여 개의 독립군 단체가 통합, 대한 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이 결성되자 부총재로 취임하였다. 1925년 3월에는 북만에서 신민부(新民府)를 창설하고 군사 부위원장 및 총사령관이 되었으며, 성동 사관 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세워 부교장으로서 정예 사관 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때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국무 위원으로 임명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927년 신민부 중앙 집행위원장에 취임하여 신민부를 통솔하며, 한인 사회의 보호에 주력하였으며, 1929년에는 신민부의 후신으로 한족 총연합회(韓族總聯合會)를 조직하고 무정부주의 사상에 입각한 적극적인 독립 투쟁의 전개를 위해 노력하던 중 1930년 1월 24일 중동 철도선산시역(山市驛)부근 자택에서 200m 거리에 있는 정미소에서 한인 공산주의자 박상실(朴尙實)의 총격으로 순국하였다.
김좌진이 사망하자 한족 총연합회에서는 1930년 1월 27일 중동선 산시역에서 장의 준비회를 개최하고 장의를 사회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하였으며, 장례 기간 중에 1,000여 명의 조문객이 방문하였다. 그의 집 뒤편에 임시로 보관되어 있던 시신은 장례에 맞춰 자경촌[지금의 산시진 신흥촌]으로 옮겨져 매장되었으며, 동지들이 보초를 서가며 보호하였다.
그러나 자경촌에 일본인 이민단이 들어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1934년 김좌진의 본 부인 오숙근이 박물 장수로 가장하고 만주에 와서 김좌진의 시신을 고향인 홍성으로 옮겨가 밀장하였다. 이후 1957년 오숙근이 타계하자 아들 김두한이 장군의 유해를 충남 보령 현재의 묘소에 합장하여 모셨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