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桂奉禹 |
|---|---|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인물 |
|---|---|
| 성별 | 남 |
| 대표경력 | 철광단 단장 |
| 출생 시기/일시 | 1880년 9월 15일 |
| 활동 시기/일시 | 1908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0년 12월 |
| 활동 시기/일시 | 1911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4년 |
| 활동 시기/일시 | 1919년 2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4월 |
| 활동 시기/일시 | 1921년 4월 말 |
| 몰년 시기/일시 | 1959년 7월 5일 |
| 추모 시기/일시 | 1995년 |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10년 12월 |
| 출생지 | 함경남도 영흥읍 |
| 거주|이주지 | 길림성 |
| 거주|이주지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하마탕 |
| 거주|이주지 | 러시아사할린 |
만주와 러시아 지역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
1908년 동경 유학생 단체인 태극 학회(太極學會)의 영흥 지회에 들어가 진지사(眞志士) 등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며 계몽 운동에 참여하였다. 국내에서의 신민회(新民會) 운동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1910년 12월 북간도로 망명하였으며, 정재면·남공선과 함께 간민 교육회(墾民敎育會) 교과서 편찬 위원으로 활동 하였으며, 1911년 북간도국자가(局子街)소영자(小營子)에 자리를 잡고 이동휘 등과 함께 광성 학교 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1914년 연해주로 이주하여 단선(檀仙)이라는 필명으로 『권업 신문(勸業新聞)』의 기자로 활동 하였으나 연해주에서 퇴거령이 내려지자 이동휘(李東輝)의 가족과 함께 왕청현 하마탕으로 이주하였다.
1919년 2월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평양으로 갔다가 3·1 운동을 목도하였으며, 여름에 북간도로 돌아와 철광단(鐵光團)에 가입하고 단장에 피선되었다. 또한 국민회(國民會)에서 임시 정부 위원으로 파견되어 활동 하였는데 1920년 2월 26일부터 독립 신문에 「아령실기(俄領實記)」를 연재하였다.
이동휘와 함께 고려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으며, 모스크바코민테른에 대표로 참가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동휘계의 고려 공산당 상해파는 문창범(文昌範)을 영수로 하는 세칭 이르쿠츠크파 고려 공산당과 치열한 반목 관계에 있었다. 1921년 4월 사할린 의용대가 주둔하는 마사노프에 도착, 제2차 한인 군사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이는 이르쿠츠크 집단에 반대하는 사할린 의용대를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르쿠츠크 집단과의 군권 투쟁으로 야기된 자유시 사태에 연루되어, 1921년 4월 말 붙잡혀 이르쿠츠크로 압송되었다.
1937년 연해주 한인들이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될 때 계봉우 역시 이거하였으며, 고려 사범 대학 등에서 교육 활동에 주력하였다, 카자흐스탄크질오르다에서 만년을 보냈다.
주요 저서로는 『조선 문학사(朝鮮文學史)』, 『조선 문법(朝鮮文法)』, 『조선 역사(朝鮮歷史)』, 『고려인의 구력과 명절의 미신』, 『동학당 폭동(東學黨暴動)』 등이 있으며, 『독립 신문』에 「북간도(北墾島) 그 과거와 현재」, 「아령실기(俄領實記)」, 「金알렉산드라小傳」, 「의병전(義兵傳)」 등을 기고하였다.
1995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