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민회

한자 墾民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합법적 조선인 자치 기관
설립자 김약연|정재면|간민 교육회
설립 시기/일시 1913년 4월
해체 시기/일시 1914년 3월
최초 설립지 연길현 용정촌
정의

북간도 지역의 민족 지도자들이 중국 당국과의 교섭을 통해 조직한 합법적 자치 기관.

설립 목적

간민회는 1913년 4월 북간도 지역의 민족 지도자들이 한인 사회의 실업과 교육·재산의 보호 및 복리 증진 등을 목적으로 설립한 합법적 자치 기관이다. 독립운동 진영의 언론에서는 간민회에 대해 일반 재류 동포가 성심 찬송하며, ‘장차 자치 생활을 할 만하게 되었다’고 하거나 ‘이주 한인 전체의 오직 하나요, 우리 민족에게 큰 신임과 애정을 받는 기관’이라고 보도하고 있었다. 또한 간민회가 조직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중국 정부가 연성 자치(聯省自治)를 인정하는 정책을 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민족 지도자들의 활동이 보다 용이한 측면도 있었다.

변천

간민회는 1913년 4월 간민 교육회의 중심 인물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했는데 성립 당시 회장에는 김약연(金躍淵), 부회장에는 김학영(金學永), 총무에는 정재면(鄭載冕)이 선출되었다. 집행 부서로는 법률, 교육, 교섭 등 12부를 두었으며, 각 지역에 지방 총회를 두고 그 밑에 지회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간민회의 자치 활동은 채 1년을 넘기지 못했는데 그 중요한 원인은 중국 당국의 정책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었다. 1914년 3월 원세개(袁世凱)는 지방에서 자치 기관을 철폐할 것에 관한 명령을 각 성에 전달하였다. 뿐만 아니라 간민회가 공화주의 사상을 바탕에 두고 신문화 교육을 강화해가자 유림 세력의 반발이 있었으며, 이들은 농무계(農務契)공교회(孔敎會)를 조직하고 간민회와 대립하는 양상을 보였다.

이후 길림 동남로 관찰사서에서는 포고 11호를 통해 간민회농무계에 대해 자치 기관으로서의 성질이 있음으로 즉시 해산하라는 지시를 하달하였으며, 간민회에서는 장업회(獎業會)를 조직하여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간민회는 중국 당국을 도와 호구 조사 사업을 전개했으며, 교육 활동 및 경제 활동에 주력하였다. 중국 당국에서는 연길, 왕청, 혼춘현에 대해 1년에 2차례 호구 조사를 실시했는데 간민회에서 파견한 조사 위원 1명이 중국 경찰 1명과 함께 조사 업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한인들은 일본 영사관 경찰이 실시하는 호구 조사에 응하지 않는 것 자체를 항일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측면도 있었다.

경제 활동과 관련해서는 한인들의 토지 문제를 간민회의 주도하에 해결하고자 하였다. 김약연은 1913년 11월 20일 토지 매매에 대한 자격과 방법 등에 관한 문제에 대해 관찰사에게 ‘건백안(建白案)’을 제출하였으며, 특히 중국에 입적(入籍)하고 토지를 구입한 한인에 대해서는 중국인들과 동일하게 대우해 줄 것으로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간민회의 이와 같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교육 문제와 관련해서는 봄·가을에 연합 운동회를 개최하여 한인 사회의 단합을 도모하고 애국심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이 운동회에는 한인들이 운영하는 학교의 학생들뿐만 아니라 중국의 관립 학교에 대해서도 동참을 요청함으로써 중국인들과의 친목도 도모하고자 했다. 또한 운동회에 참석했던 학생과 부형들은 시가를 돌며 일본 제국주의를 규탄하고 「애국가」를 부르며 한인들의 민족 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중국인들에게도 우리의 확고한 독립 의지를 전달하고자 하였다.

현황

간민회는 1913년 2월 그 건립을 발기한 이동춘(李同春)·김약연 등이 중국 당국의 허가를 얻어 4월 26일 백옥보(白玉甫)를 간민회 정식 총회 임시 회장으로 하여 국자가(局子街)에서 성립 대회를 개최하였다.

대회에서는 선거를 통해 간민회 총회의 행정 부서와 임원의 임명이 이루어졌는데 간민회 총회는 회장과 부회장을 두고 그 아래에 총무(總務), 서기(書記), 민적 조사과(民籍調査課), 교육과(敎育課), 법률 연구과(法律硏究課), 재정과(財政課), 식산 흥업과(殖産興業課), 의사과(議事課) 및 평사원(評事員) 등을 설치하였다.

당시 지회가 설립된 곳은 50여 곳에 이르렀으며, 50회에 분회 하나씩을 두었다. 의무금은 매호(每戶) 30전이었으며, 뜻있는 인사들의 의연금 또한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밖에 1913년 5월 17일에는 간민회의 장정에 따라 분회(分會) 조직 사업을 마친 화룡현 분회에서 회장 마진(馬晉), 부회장 남위현(南韋鉉) 등을 선출하고 이를 중국 당국에 보고하였으며, 1914년 2월에는 국자가에 있는 간민회 회관에서 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참석한 인원이 약 700여 명이었으며, 900여 원의 의무금도 걷혔던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간민회의 성립과 활동은 북간도 지역의 민족 지도자들이 한인 사회에 대한 보호와 발전 및 민족 의식의 성장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이 같은 노력은 1920년대 이후 만주 지역에서의 항일 무장 투쟁이 보다 적극적이고 지속적으로 전개될 수 있는 토대를 형성하는 데 기여하였다.

참고문헌
  • 한국 독립 유공자 협회, 『中國 東北 地域 韓國 獨立 運動史』(집문당, 1997)
  • 독립 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소, 『북간도 지역 한인 민족 운동』역사 공간, 2008
  • 황민호, 「1910년대 전후 재만 한인 사회와 간민회의 동향」(「전쟁과 유물』 6, 전쟁 기념관,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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