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특설 부대

한자 間島 特設 部隊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기관
설립 시기/일시 1938년 9월 15일
해체 시기/일시 1945년
개칭 시기/일시 1940년 3월까지
개칭 시기/일시 1942년까지
개칭 시기/일시 1943년 5월까지
개칭 시기/일시 1944년 7월까지
개칭 시기/일시 1945년 8월 15일까지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39년 이후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44년 이후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9년 11월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43년 1월까지
최초 설립지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안도현 명월구
정의

간도성 성장 이범익(李範益)의 건의로 1938년 9월 15일에 조직된 만주지역 항일무장세력을 탄압한 전문 무장조직.

설립 목적

간도 지역 항일 무장 부대에 대한 탄압과 이주 한인들에 대한 통제를 목적으로 설립되었으며, 특히 만주국 건국 이후 한인 청년들을 징병제의 틀 속에서 새롭게 조직화하고자 하는 의도도 반영하고 있었다.

변천

1938년 9월에 조직된 간도 특설대는 1940년 3월까지는 염천(染川) 부대라고 하였으며, 1942년까지는 원부(園部) 부대, 1943년 5월까지는 좌좌목(佐佐木) 부대, 1944년 7월까지는 시전(柴田) 부대, 해방이 될 때가지는 등정(藤井) 부대로 불리는 등 주로 지휘관의 이름에 의해 별칭으로 통용되고 있었다.

초기에 간도 특설대는 안도현 치안대, 혼춘 국경 감시대, 연길현 청년 훈련소, 봉천 만주 군관 학교 및 기타 만주국군 부대에서 선발된 위관급 이상의 일본인 군관 7명과 한인 위관 9명, 한인 하사관 9명으로 안도현 명월구에서 그 조직 준비 작업에 착수했으며, 한인 청년들의 자발적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10월부터는 본격적으로 한인 청년들을 모집하기 시작하였으며, 한인 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위문금을 걷기도 하였다. 그러나 위문금의 모금 실적은 1939년 11월 용정촌의 경우, 모금 실적을 높이기 위해 관공서에 할당량을 채우도록 독려해야 하는 등 별다른 호응을 얻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간도 특설대는 설립 초기에는 만주국 국무원 치안부 소속의 길림 제2관구 사령부의 지휘를 받았으며, 1939년부터는 목단강 제6군관구 사령부의 지휘를 받았다. 또한 간도 특설대는 1944년부터는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던 열하성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으며, 열하성에서의 전투 능력을 인정받아 하북성으로 그 활동 무대를 넓혔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간도 특설대의 활동은 항일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 활동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는데 이들은 편복대(便服隊)를 조직하여 농민으로 변장하여 마을에 들어가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였으며, 특히 여성들에 대한 테러 행위가 잦았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의 임무는 주로 길림(吉林)·간도(間島)·통화(通化) 등지에서 활동하던 동북항일연군 소속의 안창길(安昌吉)·양정우(楊靖宇)·진한장(陳翰章)·최현(崔鉉) 등의 항일 부대와 교전하는 것을 중요 임무로 하였으며, 1943년 1월까지 전개된 동북 항일 연군과의 전투에서 18명이 전사하기도 했다. 지원병 중에는 혈서(血書)를 쓰고 지원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이밖에 1944년 초부터 가을까지 열하성 유수림자(楡水林子)에서 활동했던 보병 2여단 김송(金宋) 중위의 경우는 1개 소대를 이끌고 이영자(李營子)에 들어와서 마을 주민 주란의(朱蘭義)가 팔로군과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그를 살해하였으며, 조선인 김동근에게 같은 이유로 물고문을 가해 죽였다. 보병 2여단의 반장이었던 김동호도 유사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그는 유수림자 서쪽 20리 마을을 수색한 끝에 팔로군 1명을 체포하여 사살하였다.

이처럼 간도 특설대가 열하성 일대에 사살한 사람은 22명이었으며, 체포한 사람도 22명에 달했다. 또한 간도 특설대는 하북성 밀운현(密雲縣) 석갑진(石閘鎭)과 평곡현(平谷縣)에서도 활동했는데 34건의 ‘토벌’을 단행하였으며, 34명의 군중을 살해하고 62명을 체포하였는데 미확인된 숫자를 포함하면 실제 피해 규모는 이보다 훨씬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현황

간도 특설대는 1938년 12월 15일 200명의 청년 대원들을 모집하여 제1기병 입대식을 거행하였으며, 1945년 4월까지 7기병을 모집하였는데 총 인원은 690명 정도였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제2기의 모집 인원은 100명이었으며, 제5기는 70명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80명의 병력을 모집하였다.

지원 자격으로는 첫째, 20세 미만으로 간도성 내 거주 한인 남자로서 신체 건강하고 품행이 방정한 자. 둘째, 보통 학교 졸업 정도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일본어 해독이 가능한 자. 셋째, 보증인 2명 이상으로 전과가 없고 군경 근무 경력이 없는 자로 제한하였다.

부대의 구성은 부관실, 의무실, 군수실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보병과 박격포로 무장한 기박(機迫) 2개 연대가 설치되었다. 이후 1940년 12월에는 보병, 기박, 신병의 3개 연대로 조정되었으며, 1944년 열하로 이동한 후에는 본부에 부관처를 설치하여 군수, 군기, 통신 등의 업무를 총괄하게 하였으며, 전문적인 정보반을 두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간도 특설대는 엄격한 훈련을 통해 대원들을 만주국 각 기관 및 협화회 청년 훈련소 등에 조교로 파견하기도 하였으며, 하사관 가운데 훈련 성적이 우수한 경우는 만주 군관 학교에 파견하여 일정한 교육 과정을 이후 한 후 소위로 임관되어 돌아와 활동하기도 하였다.

의의와 평가

간도 특설대는 한인들로 구성된 친일 무장 조직이었으며, 그 활동 범위는 간도 지역뿐만 아니라 만주 전역과 열하성, 하북성 일대에서도 활동하면서 항일 무장 세력을 잔인하게 탄압하는 가장 대표적인 조직으로 이름을 떨쳤다.

따라서 이들의 활동은 한인 사회를 분열시키는 한편, 해방 이후 한인 사회가 반드시 해결하고 가야하는 역사적 과제로 남겨지게 되었다. 간도 특설대에서 활동했던 한인들의 활동이나 해방 이후의 처리문제 등에 대해서는 보다 명확하고 세밀한 연구가 필요하다.

참고문헌
  • 임종국, 『실록 친일파』(돌베개, 1991)
  • 김효순, 『간도 특설대 : 1930년대 만주, 조선인으로 구성된 '친일 토벌 부대'』(서해 문집, 2014)
  • 김주용, 「만주 지역 간도 특설대의 설립과 활동」(『한일 관계사 연구』 31, 한일 관계사 연구회, 2008)
  • 조건, 「일제의 간도성 ‘조선인특설부대’ 창설과 재만 조선인 동원(1938~1943)」(『한국근현대사연구』 49,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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