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참변

한자 間島 慘變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일본군의 재만 한인에 대한 학살 사건
관련인물/단체 일본군 19사단 목촌 지대|14사단|회령 수비대 등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0년 10월
종결 시기/일시 1921년 5월
발생|시작 장소 간도
종결 장소 간도
정의

1920년 10월부터 1921년 5월까지 청산리 전투에서 패전한 일본군이 간도 지역에서 한인들을 상대로 자행한 학살 사건.

역사적 배경

1920년 6월 북간도의 봉오동 전투(鳳梧洞戰鬪)에서 대패한 일제는 활발한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하는 독립군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을 위해 이른바 ‘간도 지방 불령 선인 초토 계획(間島地方不逞鮮人剿討計劃)’을 수립하고 간도로 침입하였다.

이들은 각각 동 지대(東支隊)·기림 지대(磯林支隊)·목촌 지대(木村支隊)·사단 직할 부대·국경 수비대 등으로 재편성되었으며, 그 규모는 18,000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이들 부대가 독립군 연합 부대에 의해 청산리 전투에서 패전하여 ‘토벌’ 계획이 무산되자 무고한 한인들을 학살하는 경신 참변을 자행하였으며, 이는 1920년대에 일제가 한민족에 대해 저지른 가장 참혹한 만행의 하나였다.

경과

북간도를 침범한 일본군 19사단 예하의 목촌 지대는 10월 22일 왕청현 서대파와 십리평에서 북로 군정서의 병영과 사관 연성소 건물을 불태웠으며, 1920년 10월 말에는 장암동 참변(獐巖洞慘變)을 일으켰다.

연해주로부터 침입한 일본군 제14사단 제15연대 제3대대장 대강융구(大岡隆久) 이하 77명의 병력은 용정촌 북방 25리 지점에 위치한 장암동에 들어와 기독교인이 대다수인 전 주민을 교회에 집결시켜 놓고 40세 이상의 남자 33명을 바닥에 꿇어앉힌 다음, 짚단 등으로 교회를 채운 후 석유를 뿌린 후 불을 질렀다. 교회는 즉시 화염에 싸였으며, 일본군은 불속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을 모두 찔러 죽여 결국 몰살시키는 만행을 자행하였다.

넋을 잃은 가족들은 일본군이 돌아간 후 숯덩이가 된 시신을 수습하여 겨우 옷을 입혀 장례를 치렀다. 그런데 5~6일 후 일본군이 다시 그 마을을 습격해 와서 무덤을 파 시체를 한 곳에 모으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가족들은 살길을 도모하기 위해 언 땅을 다시 파고 모든 시체를 모아 놓자 일본군은 이번에는 시체 위에 짚단을 얻고 석유를 뿌린 후 불을 질러 시신이 숯이 되고 재가 되도록 태웠다. 이렇게 이중으로 학살당한 시체는 그 형체를 알 수 없어 가족들은 할 수 없어 시신을 합장하여 분묘(墳墓)를 만들었다.

또한 1920년 10월 19일에는 회령 수비대 대장 성전(成田) 중좌가 지휘하는 일본군이 화룡현 북장패촌의 촌장 이용점과 농민 장두환, 신국현, 김종민 등을 체포하여 풍도령(風度領)에서 살해하였으며, 화룡현 송언둔(宋堰屯)에 침입하여 집을 수색하고 지계순 등 14명을 학살한 후 석유를 뿌리고 시체를 소각하는 ‘송언동 학살 사건’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이밖에 일제는 백운평 전투에서 패배한 보복의 일환으로 백운평 마을 23세대에 사는 남자는 젖먹이까지 모두 학살하였으며, 10월 20일에는 명동학교(明東學校)가 소각당하였다. 『동아 일보』의 장덕준(張德俊) 기자가 실종된 것도 이즈음의 일이었으며, 일제의 만행은 용정에서 제창 병원을 경영하던 영국인 선교사 마틴(Dr. S. Martin)[민산해(閔山海)] 등에 의해 국내외 언론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결과

경신 참변으로 국내외를 통해 일본군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일제는 12월 20일을 기해 주력 부대의 간도 철수를 결정하였으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일본군은 12월 16일 19사단의 일부 병력을 ‘간도 파견대’라고 하여 현지에 남겨 두었는데 12월 31일 편성을 마친 간도 파견대는 용정촌, 국자가, 백초구, 두도구, 의란구 등지에서 독립운동 세력에 대한 수색 작업과 귀순자 문제 처리에 주력하였다.

또한 일제는 1921년 2월에는 간도 연락반을 편성하여 용정촌, 두도구, 백초구, 천보산 등지에 주둔시켜 첩보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1921년 5월 잔여 부대가 완전히 철수한 후에도 연락반을 ‘연락원’으로 개칭하여 계속적으로 활동하게 하는 등 간도에서의 영향력 강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의의와 평가

일본군의 토벌은 재만 한인들이 집거하고 있는 연길·화룡·훈춘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피해는 독립군이 아닌 주로 양민을 대상으로 전개되었고 피해의 내용은 살인 방화를 중심으로 한인들의 생활 기반을 철저하게 파괴하는 형태로 이루어지는 잔인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참고문헌
  • 尹炳奭, 『獨立軍 史』(지식 산업사, 1991)
  • 한국 독립 유공자 협회, 『中國 東北 地域 韓國 獨立 運動史』(집문당, 1997)
  • 황민호·홍선표, 『3·1 운동 직후 무장 투쟁과 외교 활동』(독립 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소, 2008)
  • 蔡永國, 「1920년「琿春 事件」전후 獨立軍의 動向」(『한국 독립운동사 연구』 제5집,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소,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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