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朝鮮 獨立 期成會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독립운동 단체 |
|---|---|
| 설립자 | 용정의 3·13 운동 주도자 |
| 설립 시기/일시 | 1919년 3월 |
| 개칭 시기/일시 | 1919년 5월 |
| 최초 설립지 | 길림성 연길현 전만자(田灣子) |
1919년 3월에 길림성 연길현 국자가(局子街)에서 결성된 한인들의 독립운동 단체이자 대한 국민회(大韓國民會)의 모체가 된 독립운동 단체.
조선 독립 기성회는 3·1 운동이 전개되자 연길현 국자가에 본부를 두고 있던 조선 독립 의사회(朝鮮獨立議事會)의 후신으로 조직되었다. 조직 설립을 주도한 중요 인물들은 3·1 운동 이전 간민회(墾民會)를 통해 북간도 한인 사회의 자치와 민족주의 교육, 그리고 독립운동을 꾸준히 전개 해온 인물들이었다.
그런 가운데 1919년 4월 상해(上海)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조직되자 조선 독립 기성회에서 이를 지지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과정에서 회명(會名)과 국호(國號)가 서로 맞지 않은 상황이 발생하였다. 이에 조선 독립 기성회에서는 대표자 회의를 통해 명칭을 간도 대한인 국민회(間島大韓人國民會)로 변경하고 임시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또한 같은 해 2월 말 러시아연해주에서 대한 국민의회가 성립하자, 그 해 5월부터는 대한 국민의회 간도 지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성립 초기에는 기독교·천주교·천도교·대종교·공교회(孔敎會) 등 여러 종교 계통의 인물들이 참가하였으나 이후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간도 대한 국민회로 개편되자 여타의 종교인들은 탈퇴하여 다른 단체를 조직하였다.
조선 독립 기성회는 간도 지역의 모든 독립운동 세력을 통합하고자 노력하였는데 『조선 국민보(朝鮮國民報)』를 발행하여 한인(韓人)들의 독립 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으며, 3·13 만세 시위에서 희생된 순국자들의 장례식을 17일 국민장(國民葬)으로 거행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후 희생자들의 유해는 5,000여 군중의 애도 속에 용정 남쪽 10리에 있는 허청리(虛淸里)의 양지바른 언덕에 안장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