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 대한 국민회

한자 間島 大韓 國民會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기관
설립자 구춘선
설립 시기/일시 1919년 3월
개칭 시기/일시 1919년 5월 17일
관련 사항 시기/일시 1920년 5월 28일
최초 설립지 연길시 장백향 인평촌
정의

길림성(吉林省) 연길(延吉) 국자가(局子街)에서 1919년에 조직된 항일 독립운동 단체.

설립 목적

1919년 3월 13일 용정(龍井) 만세 시위 운동을 주도한 세력들은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기 위하여 간도 대한 국민회를 설립하였다.

변천

1919년 용정 3·13 운동 직후인 3월 말에 국자가(局子街) 솔만자(甩灣子)에서 기존의 간도 독립운동 기성총회를 모체로 새롭게 설립되었다. 원래의 명칭은 ‘간도 조선 국민 의회(間島朝鮮國民議會)’였다.

1919년 5월 17일 용지향(勇智鄕)명동학교(明東學校)에서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고 상해(上海)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승인하고 간도 대한 국민회로 개칭하였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간도 대한 국민회는 총회 산하에 지방 총회를 두고, 지방 총회 산하에 지회를 두었다. 국민회는 연길·화룡(和龍)·왕청(汪淸) 등 3개 현(縣)을 중부·동부·서부·남부·북부 등 5개 구역으로 나누고 이들 각 지역에 지방 총회를 설치하였다. 대한 국민회 총회장은 구춘선(具春先)이었다. 외곽 조직으로서 간도 대한 청년회를 설립하였다.

1920년 8월 대한 국민회의 지방 지회는 100여 개에 달하였다. 『조선 독립 신문』·『조선 국민보』·『우리들의 편지』·『태극기』 등 간행물을 발행하였다. 1920년 초에 조직된 국민회군은 약 450명에 달하였다. 연길현 용지향 이청배(二靑背)에 사관 학교를 건립하였다. 1920년에 모금한 군자금은 17만원에 달하였다.

1920년 5월 28일에 안무(安武)의 국민회군(國民會軍), 홍범도(洪範圖)대한 독립군(大韓獨立軍), 최진동(崔振東)군무 도독부(軍務都督府)를 통합하여 대한 북로 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결성하였다. 1920년 6월 7일 홍범도대한 북로 독군부를 이끌고 봉오동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후 신민회(新民會)·의민단(義民團)·한민회(韓民會) 등과 연합 부대를 결성하였다. 1920년 10월 하순 홍범도가 거느린 상기 연합 부대는 청산리 전투에 참가하였다.

그 후 국민회군은 북만과 노령으로 철수하였다. 잔류한 국민회의 구춘선 등 간부들은 돈화에서 국민회 군사부를 설치하고, 1921년 12월 고려 공산당[상해파]의 외곽 단체인 ‘고려 공산당 중앙 총감부’로 개칭되었다.

의의와 평가

간도 대한 국민회는 당시 만주 지역에서 규모가 가장 큰 항일 독립운동 단체였다. 국민회는 다른 독립운동 단체와 연합을 적극 모색하면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참고문헌
  • 宋友惠, 「北間島 大韓 國民會의 組織 形態에 관한 硏究」(『한국 민족 운동사 연구』 1,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회, 1986 )
  • 박창욱, 「간도 국민회를 논함」(『국사관 논총』 15, 국사 편찬 위원회, 1990)
  • 박환, 「北間島 大韓 國民會의 成立과 活動」(『윤병석 교수 화갑 기념 한국 근대사 논총』, 지식 산업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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