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유격대

한자 抗日 遊擊隊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단체 만주지역 항일 무장 투쟁 단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31년 10월
항일 무장 단체 파언·반석·해룡·연길·훈춘·왕청·안도·화룡·주하·밀산·영안·탕원 등 지역
정의

1931년 10월 중국 공산당 만주성 위원회의 지시로 만주의 파언·반석·해룡·연길·훈춘·왕청·안도·화룡·주하·밀산·영안·탕원 등 지역에 설립된 비정규적인 항일 무장 단체.

개설

1931년 10월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의 지시에 의하여 항일 유격대가 설립되었다. 1933년 1월 기존의 항일 유격대를 기반으로 동북 인민 혁명군을 조직했다. 1935년 중국 공산당 중앙은 ‘8·1선언’에 따라 동북 인민 항일 연군을 조직하였다. 동북 인민 항일 연군은 1940년경에 근거지를 소련연해주로 옮겼다. 소련으로 이동한 동북 인민 항일 연군은 동북 인민 항일 연군 교도려를 설립하고 1945년 8월까지 소부대 활동을 통하여 항일 투쟁을 견지했다.

연원 및 변천

1931년 9월 18일 일본 제국주의는 만주에 대한 대규모 무력 침공 전쟁을 발동했다. 중국 전역에서는 장개석 정부의 ‘부저항 정책’에도 불구하고 대규모 반일운동이 발발했다. 중국 공산당은 여러 가지 형식의 선언, 결의, 지시 등을 통하여 일본 제국주의 무력 침공을 규탄하고 전 민족적인 항일 운동을 주창하였다.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1931년 10월 12일 중공 만주성 위원회에 항일 유격대와 항일 유격 근거지의 창설을 지시했다. 1932년 봄에 이르러 파언(巴彥)·반석(磐石)·해룡(海龍)·연길(延吉)·훈춘(琿春)·왕청(汪淸)·안도(安圖)·화룡(和龍)·주하(珠河)·밀산(密山)·영안(寧安)·탕원(湯原) 등 수십 개 반일 유격대, 항일 구국 유격군(抗日救國遊擊軍)과 수녕 반일 동맹군(綏寧反日同盟軍)을 설립하여 항일 유격전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1932년 6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북방 각성위원회 대표들이 참석한 북방 회의를 소집하고 중국 전역에서 토지 혁명 추진, 소비에트 정부 수립, 홍군의 건설 등 공산 혁명 확대 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공산 혁명의 확대 추진으로 성격을 달리하던 ‘의용군’·‘구국군’·‘자위군’ 등 반일 부대와의 공동 항일 투쟁이 힘들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1933년 1월 중국 공산당 중앙은 중공 만주성 위원회에 ‘1월 서한’을 보냈다. 1월 서한의 핵심은 항일 통일 전선의 구축과 다른 항일 부대와의 공동 전선 형성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남만과 동만 유격구에서는 기존의 유격대를 기초로 하여 동북 인민 혁명군 제1군에서 6군까지를 조직했다. 특히 조선인이 많이 거주하던 동만에서는 연길·화룡·왕청·훈춘 등 각 현에 조직되어 있던 유격대를 통합하여 동북 인민 혁명군 제2군 제1독립사를 결성하고 사부(師部)를 발족시켰다. 사장(師長)에는 조선인 주진(朱鎭)이, 정치위원에는 중국인 왕덕태(王德泰)가 취임했다. 제2군 제1독립사가 독립사로 되면서, 이 부대는 위의 4개 현의 유격대를 개편하여 1단·2단·3단·4단과 독립단을 거느리게 되었다. 중국 공산당의 지도 아래 조직된 군대였으나, 사실상 절대 다수가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조선인 부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35년 중국 공산당 중앙은 ‘8·1선언’을 발표했다. ‘중화 소비에트 정부와 동북 각지의 항일 정권을 단일적·전국적 국방 정부로 조직하고, 홍군과 동북 인민 혁명군 및 각지의 반일 의용군을 하나로 전 중국적 항일 연군으로 조직하라’는 것을 골자로 하는 항일구국 선언이었다. 이 선언에 따라 종래 인민 혁명군을 유지하여 온 만주성위는 이것을 항일 연합군 조직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기존의 동북 인민 혁명군만이 아니라, 그 밖의 모든 반일 무장대를 항일구국의 기치아래 단결시켜 총 3로군 11군에 달하는 ‘동북인민항일연군’이 조직되었다. 제1로군에는 제1·2군이, 제2로군에는 제4·5·7·8·10군이, 제3로군에는 제3·6·9·11군이 각각 소속되어 있었다. 동북 인민 항일 련군의 병력이 최고 많을 때 4만 여명에 달하였다.

동북 항일 연군에는 많은 조선인 대원들이 활약했다.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제1로군에 김일성(金日成)·서철(徐哲)·최현(崔賢)·오백룡(吳白龍)·임춘추(林春秋)·안길(安吉) 등이 있었고, 제2로군에는 최용건(崔庸健)이 있었고, 제3로군에는 허형식(許亨植)이 있었다. 김책(金策)은 중국 공산당 북만성 위원회 서기로 활동하였다.

동북 항일 연군은 일제와 ‘만주국’군의 잔인무도한 ‘토벌’로 부득이 하게 1940년경에 근거지를 소련연해주로 옮겼다. 소련으로 이동한 동북 인민 항일 연군은 동북 인민 항일 연군 교도려(소련 원동 홍군 독립 88려)를 설립하고 소부대 활동을 통하여 1945년 8월까지 지속적인 항일 투쟁을 견지하였다.

내용

항일 유격대는 비정규적인 무장 단체로서 적의 통치 구역과 점령 구역, 적과 인접한 지역에서 분산, 유동, 습격이라는 전법으로 적을 타격하였다. 적이 진공하면 나는 퇴각하고, 적이 퇴각하면 나는 진공하고, 적이 피로하면 나는 타격하고, 적이 도망가면 나는 추격하는 전법을 구사했다. 항일 유격대는 편제를 될수록 간소하게, 경무장으로 비정규적인 습격을 주요 작전 수단으로 삼았다. 또한 효과적인 유격전을 위하여 고도의 이동성·기민성·주동성·진공성·신속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의의와 평가

중국 동북지역은 중국의 여러 항일 전장 가운데서 가장 항일투쟁의 여건이 어려운 지역이었다. 항일 유격대는 일본 관동군과 ‘만주국’군의 가혹한 무장 ‘토벌’속에서도 다른 반일 무장대와 공동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14년동안 반일 항일 무장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견지하였다. 항일 유격대는 반만 항일 투쟁속에서 다른 항일 무장 세력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으로,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 저항하는데 주춧돌 역할을 담당하였다.

참고문헌
  • 东北抗日联军斗争史编写组, 『东北抗日联军斗争史』(人民出版社,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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