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령 전투

한자 古馬嶺 戰鬪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길림성 통화시 집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전투
관련인물/단체 최석순|홍석호|참의부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5년 2월 27일
발단 시기/일시 1925년 2월 27일
발생|시작 장소 길림성 집안현 고마령
정의

1925년 2월 27일 길림성의 집안현(集安縣) 고마령에서 참의부(參議府) 소속 독립군과 일제의 초산 경찰서 소속 일본 경찰 사이에 벌어진 전투.

역사적 배경

1924년 초 성립된 참의부의 정식 명칭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육군 주만 참의부(陸軍駐滿參議府)이다. 참의부정의부(正義府)·신민부(新民府) 등과 함께 3부로 불리며, 압록강변의 집안현(集安縣)·장백현(長白縣)·유하현(柳河縣) 등을 근거지로 하여 재만 한인의 자치를 위한 민정(民政) 활동과 활발한 항일 무장 활동을 동시에 전개하였다. 일제는 이러한 참의부에 치명타를 가할 기회를 엿보다가 기습 공격을 가하였다.

경과

1925년 2월 27일 참의부의 참의장 겸 제2중대장을 겸하고 있는 최석순(崔錫淳)이 60명의 대원들과 함께 집안현의 고마령에서 군사 회의를 개최하고 있었다. 이를 사전에 파악한 일제의 초산 경찰서 소속의 일경 1부대가 기습 공격을 가하였다. 완전 무방비 상태에서 회의를 개최하고 있던 참의부 대원들은 제대로 반격도 못해보고 당해야만 했다. 참의장 최석순 등 42명이 사살되고 3명이 피체되었으며, 15~16명의 대원만 가까스로 피신하였다.

결과

참의부의 제2중대가 이러한 기습 공격을 당한 것은 제1중대장인 홍석호(洪碩浩)가 일제의 관헌에게 밀고한 때문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이에 살아남은 제2중대원들은 홍석호를 암살하고 말았다. 이번 사건으로 참의부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참의부는 1925년 4월 진로를 새롭게 한다는 의미에서 단체의 명칭을 도독부(都督府)[또는 진동 도독부(鎭東都督府)]라고 고치고 기존의 항일 무장 투쟁 위주에서 자치를 위한 활동과 군사적 활동을 똑같이 중시하는 방향으로 조직을 개편하였다. 하지만 1925년 5월 임시 정부에서 파견된 특사의 지시에 의해 단체의 명칭은 다시 6월 26일자로 참의부로 환원하였다.

의의와 평가

참의부는 고마령 전투에서 대패하고 난 뒤 조직은 물론이고 노선을 이주 한인을 위한 자치 활동에 치중하는 방향으로 변경하였다. 고마령 전투에 의한 이 단체의 피해가 어떠했나를 짐작케 하는 부분이다.

참고문헌
  • 김승학, 『한국독립사』(독립문화사,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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