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거

한자 安重根 義擧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흑룡강성 하얼빈시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사건
관련인물/단체 안중근|우덕순|조도선|유동하|유진율|이강|김형재|김성백/대동공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9년 10월 26일
전개 시기/일시 1909년 10월 10일
전개 시기/일시 1909년 10월 23일 경
발생|시작 장소 하얼빈역
정의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흑룡강성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의거.

역사적 배경

1909년 9월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의 만주 시찰 외신을 접한 후,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을 구체화시켜 나갔다. 1909년 10월 10일 러시아연해주대동 공보(大東公報)사 사무실에서 시국 문제를 토론하는 자리에서 이토 히로부미 포살이 논의되었다.

참석자는 사장 겸 총무인 유진율(兪鎭律), 주필 정재관(鄭在寬), 기자 윤일병(尹日炳)·이강(李剛)·정순만(鄭順萬), 연추(烟秋) 지국장 탐방원 안중근과 집금 회계원 우덕순(禹德淳) 등이었다. 안중근이 실행의 책임을 자임하고 우덕순도 나섬으로써, 이토 포살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경과

유진율은 안중근에게 자금과 권총 3정을 넘겨주었으며, 이강은 대동 공보 하얼빈 지국을 맡고 있는 김형재(金衡在)에게 소개 편지를 써 주었다. 1909년 10월 21일 안중근우덕순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역을 출발하였다. 안중근은 포그라니치야역에 내려 친지인 한의사 유경집(劉敬緝)을 방문하고 그의 아들 유동하(劉東夏)를 통역원으로 데리고 하얼빈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김형재를 찾아가 이강의 편지를 건네주었고, 김형재의 소개로 조도선(曺道先)이 합류하였다.

1909년 10월 23일경 안중근 일행은 김형재의 소개로 김성백(金聖白)의 집에서 활동 계획을 상의하였다. 그들은 기차가 쉬는 채가구(蔡家溝)에는 우덕순·조도선을 배치하고, 하얼빈은 안중근이 맡기로 하였다. 유동하는 통역과 두 지점 사이의 연락을 담당하였다. 안중근유동하로부터 이토가 10월 25일 아침 하얼빈에 도착할 예정이라는 연락을 받고, 10월 24일 채가구에 우덕순조도선을 배치한 다음 하얼빈으로 돌아왔다.

이토는 10월 18일 대련(大連)에 상륙하여, 여순(旅順)·봉천(奉天)·무순(撫順)을 거쳐 10월 25일 밤 장춘(長春)에 도착한 뒤 러시아 귀빈 열차편으로 갈아타고 하얼빈으로 향하였다. 그런데 채가구에서의 거사 계획은 불발되었다. 10월 24일 안중근이 하얼빈에 돌아올 때, 세 사람이 포옹하고 울며 이별하는 광경을 수상하게 여겼던 러시아 경비병이 이토를 태운 특별 열차가 지나갈 때 우덕순·조도선이 투숙한 역 구내의 여인숙 문을 바깥에서 잠가 버렸기 때문이다.

10월 26일 오전 9시 특별 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였다. 이토는 출영 나온 제정 러시아 대장 대신(大藏大臣) 코코프초프와 열차 안에서 30여 분간 회담한 후 플랫폼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토는 도열한 러시아 의장대를 사열하였다. 사열을 마친 이토는 되돌아서서 귀빈 열차 쪽으로 향하였다.

이때 안중근은 러시아 의장대 후방에 있었다. 이토가 자기 앞을 지나쳤다가 되돌아오는 찰나 의장대 앞으로 뛰쳐나가며 이토의 가슴을 조준하여 브라우닝 8연발 권총으로 네 발을 발사하였다. 세 발이 이토에게 정확하게 명중되었다. 저격 직후 안중근은 자신이 발사한 대상이 이토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 일본인 집단 중에서 의젓해 보이는 자를 향해 세발을 연이어 발사하였다. 안중근의 사격으로 이토를 수행 중이던 가와카미[川上]하얼빈 총영사와 비서관 모리[森泰二郞], 다나카[田中]만철(滿鐵) 이사 등이 중경상을 입었다. 제8탄을 발사하기 직전 안중근은 러시아군에게 제지되었고, 그는 러시아말로 ‘코레아 우라[대한 만세]’를 연창한 후, 태연자약하게 체포되었다. 이토는 약 30분 후 절명하였다.

결과

안중근은 여순 법정에서 자신은 한국 ‘의병 참모 중장(義兵參謀中將)’의 자격으로 적장 이토를 포살했다고 주장했다. 즉 이토 히로부미 포살은 독립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작전 지역 내에 들어온 적장을 공격한 것으로, 그 자체가 독립 전쟁의 일환이라는 논리를 폈다. 그리고 독립 전쟁은 침략자에 대한 정의의 항거이며, 따라서 자신은 일반 자객이나 죄인이 아니고, 적군인 일본군의 포로가 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의의와 평가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포살은 한국 침략의 원흉 및 동양 평화의 파괴자에 대항하여 인간의 자유를 지키려는 정의의 응징이었다.

참고문헌
  • 『나라 사랑(안중근 특집)』34(외솔회, 1979)
  • 장석흥, 『안중근의 생애와 구국 운동』(독립기념관,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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