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자령 전투

한자 大甸子嶺 戰鬪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흑룡강성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한중연합군이 일본군을 격파한 사건
관련인물/단체 한국 독립군|지청천|중국 의용군 부대
발생|시작 시기/일시 1933년 6월 30일
발생|시작 장소 길림성 왕청현 대전자령
정의

1933년 6월 30일 한국 독립군(韓國獨立軍)이 중국 의용군(中國義勇軍) 부대와 연합하여 중국길림성(吉林省) 왕청현(汪淸縣)의 대전자령(大甸子嶺)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한 전투.

역사적 배경

1930년 7월 홍진(洪震) 등은 북만주의 위하현(葦河縣)에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을 조직하였다. 1931년 10월 한국 독립당은 일본의 중국동북지방 침략에 대항하여 군사위원장 이청천(李靑天)을 총사령으로 하는 한국 독립군을 편성하였다. 초창기 한국 독립군은 약 150여 명이었다. 한국 독립군은 중국 항일군과 연합하여 서란현(舒蘭縣)·쌍성보(雙城堡)·경박호(鏡泊湖)·사도하자(四道河子)·동경성(東京城)·동녕현성(東寧縣城) 등지에서 전투를 벌이고 만주국군 및 일본군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1933년 6월 하순 왕청현 동북의 산악 지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국 독립군과 길림 구국군 시세영(柴世榮)부대는 대전자(大甸子)에 주둔하고 있던 한국주군 19사단의 간도 임시파견대가 연길현(延吉縣)으로 철수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이에 한·중 양군은 3일간 100여 ㎞를 강행군하여 6월 28일 경 대전자 북방의 노모저하(老母猪河)에 도착하였다.

경과

한국 독립군은 적의 통과 예상 지점인 대전자령의 양편 산허리에 매복하였다. 당시 한국 독립군 주력 부대 약 500여 명, 구국군은 약 2,000여 명이 참가하였다. 1933년 6월 30일 아침 6시경 일본군은 많은 자동차와 우마차에 화물을 싣고 대전자령을 향해 출발하였다. 당시 일본군의 규모는 약 1,600명이나 되었다. 오후 1시경 일본군의 전차 부대가 지나간 뒤 화물 자동차를 앞세우고 본대가 계곡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결과

한국 독립군과 시세영 부대는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맹공격을 퍼부었다. 매복에 걸려든 일본군은 중무기와 차량 등을 버리고 도주코자 하였으나, 결국 거의 궤멸되고 말았다.

의의와 평가

대전자령 전투는 한국 독립군이 치른 전투 가운데 전례가 없는 전과를 거둔 대규모 작전이었다. 또한 한·중연합군이 일본군을 선제공격한 전투였다는 점에서도 그 의미가 돋보인다.

참고문헌
  •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한국독립운동과 대전자령전투』(역사공간,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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