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東寧縣城 戰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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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 지역 | 흑룡강성 목단강시 동녕현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한중연합군에 의한 항일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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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인물/단체 | 사충항|이청천|황해룡|오의성|한국 독립군|구국군|왕청현 유격대 |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33년 9월 6일 |
| 발생|시작 장소 | 흑룡강성 동녕현성 |
1933년 9월 6일 한국 독립군·왕청현 항일 유격대·중국 구국군 등 연합 부대가 동녕현성(東寧縣城)을 공격한 전투.
1933년 9월 6일 저녁 9시, 연합군은 동녕현성을 기습하였다. 왕청현 유격대는 서산 포대를 점령하였다. 중국 구국군과 한국 독립군은 동대문과 남대문을 통해 성안으로 진격하였다. 연합군은 다음 날 아침까지 싸워서 성안을 거의 점령하였다.
구국군의 일부가 약속을 어기고 군수 물자를 노략질 하자 한국독립군은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일본군도 대포와 장갑차를 앞세워 반격하였다. 연합군은 동녕현성을 완전히 점령하지 못하고 후퇴하였다. 구국군의 지도자인 사충항이 부상을 당했다. 이때 그의 부하들은 자신의 대장을 돌보지도 않고 급급히 후퇴하였다. 이에 왕청현 유격대의 황해룡 등은 부상당한 사충항을 업고 후퇴하였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왕청현 유격대와 구국군은 돈독한 신뢰를 쌓았다. 반면에 한국 독립군과 중국 공산당과의 대립은 동현성 전투를 치르고서도 해소되지 않았고 오히려 격화되었다. 더구나 한국 독립군은 오의성(吳義成)의 부대와 동녕현성 전투에서 노획한 군수 물자의 배분 문제를 놓고 대립하였다. 이로 인해 오의성의 부대와 결별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무장해제까지 당했다. 이 사건은 한국 독립군 병사들이 흩어지고 지휘자들이 중국 관내 지역으로 이동 하는데 영향을 주었다.
동녕현성 전투는 한국 독립군·왕청현 유격대·중국 구국군 등 정치 성향이 다른 항일 무장 부대가 반만 항일(反滿抗日)이라는 공동한 목표를 가지고 일본군과 만주국군을 상대로 전개한 대규모 연합 작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