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自由市 慘變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 지역 | 러시아 아무르주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사건 |
|---|---|
| 관련인물/단체 | 김하석|오하묵|최고려|박일리아/고려 혁명군|대한 의용군|고려 혁명 군정 의회 |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21년 6월 28일 |
| 종결 시기/일시 | 1921년 6월 29일 |
| 발생|시작 장소 | 러시아아무르주 스보보드니 |
1921년 6월 한인 독립군 통합 대부대를 편성할 때 러시아아무르주 자유시에서 고려 혁명군과 대한 의용군 사이에 발생한 유혈 내분.
통합 부대 창설 계획은 1920년 늦여름 소비에트 노농 정부와 상해 대한민국 임시 정부 사이에 체결된 비밀 군사 협정에서 비롯되었다. 이 협정에 따라 소비에트 정부는 한국 독립군 부대의 시베리아 주둔 및 양성을 승인하며 무기와 장비를 공급하기로 약속하였다.
그 대신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시베리아 주둔 독립군으로 하여금 소비에트 정부가 지정하는 적군(赤軍) 사령관의 군사 명령을 받아들이며, 시베리아를 침략하는 적대 국가에 대해 공동으로 작전하도록 승인한다는 점을 약속하였다. 이 계획에 호응하여 1920년 4월 참변 이후 활동 근거지를 상실한 연해주 각처의 한인 무장 부대, 1920년 10월 청산리 대첩 후 연해주로 이동한 북간도의 독립군 부대, 소비에트 러시아 영내에 조직된 블라고베셴스크의 자유시 보병 대대, 이르쿠츠크에서 결성된 고려 공산 대대가 아무르주 스보보드니[자유시]에 집결하였다.
1921년 4월경 아무르주에 집결한 한인 무장 부대의 전체 성원은 약 4,500명을 헤아리는 규모였다. 그러나 이들을 통합하는 과정에는 적지 않은 난관이 도사리고 있었다.
난관은 소비에트 러시아·극동 공화국·코민테른·러시아 공산당 기관들과의 교섭 과정에서 조성되었다. 게다가 한인 각 무장 부대는 원래부터 서로 다른 조건과 환경 속에서 형성되었고, 러시아와 만주의 광활한 지대에서 오랫동안 분산적으로 활동해 왔었다. 그래서 이 부대들 상호간에는 지휘·복종의 체계가 수립되어 있지 않았다. 정치·사상적으로 경향도 다양하였다.
이러한 모순은 자유시 보병 대대와 사할린 의용대 사이에 표출됐다. 자유시 보병 대대는 대한 국민의회의 정치적 지휘를 받을 것을 주장하였지만 사할린 의용대는 아무르주 한인 공산당의 지휘를 받을 것을 주장하였다. 아무르주 한인 공산당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지도적 역할을 승인하는 상해한인 사회당 계열의 사회주의 단체였다.
그런데 1920년 10월경 대한 국민의회가 공산주의를 수용하면서부터 문제는 더욱 복잡하게 되었다. 대한 국민의회는 이르쿠츠크에서 결성된 전로 고려 공산당과 긴밀히 제휴하였다. 그리하여 자유시 보병 대대와 사할린 의용대 간의 적대적 대립은 아무르주 한인 공산당과 원동 공산 총국 한인부를 한편으로 하고 대한 국민의회와 이르쿠츠크 전로 고려 공산당을 다른 한편으로 하는 정치적 반목으로 전화하였다. 1921년 5월 이르쿠츠크와 상해에서 두 개의 고려 공산당이 성립됨에 따라, 러시아 극동 아무르주에 집결했던 한인 무장 부대 상호간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 대한 의용군은 상해고려 공산당 계열의 지원을 받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지했다. 고려 혁명군은 이르쿠츠크고려 공산당 계열의 지원을 받았고 대한 국민의회를 지지했다.
1921년 6월 19일 대한 의용군과 고려 혁명군 사이에 무장 충돌 위기일발의 시점에서 통합 장교 회의가 개최되면서 양자의 통일이 결의되었다. 그러나 대한 의용군 장교 7명이 대한 국민의회의 김하석(金河錫)·오하묵(吳下黙)·최고려(崔高麗) 등 3인을 군정 의회 간부진 배제를 요구하면서 양자 간의 갈등은 더 이상 봉합하기 힘들게 되었다.
6월 27일 고려 혁명 군정 의회와 대한 의용군 사이의 분쟁이 드디어 폭발하였다. 6월 28일 오전 1시 고려 혁명 군정 의회 사령부는 극동 공화국 군부에 교섭하여 4개 중대를 차출하고, 여기에 고려 혁명군을 가세하여 대한 의용군의 주둔지인 수라셉카에 파견하였다. 쌍방은 28일 오후 4시까지 계속 대치하였다. 마침내 고려 혁명군이 공격에 착수하였다. 전투는 고려 혁명군의 승리로 끝났다. 고려 혁명 군정 의회는 6월 30일 ‘임시 검사부’를 조직하여 ‘포로’ 군인 900여 명을 3개 부류로 나누어 처리하였다.
자유시 참변으로 최소 100명에서 최대 500명에 달하는 독립군 병사들이 사망되거나 행방불명이 되었다. 그리고 3·1 운동 직후 고조된 반일 무장 투쟁의 열기가 한풀 꺾이고, 독립 전쟁론에 입각한 운동 방침은 후퇴하기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