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間島 農民 鬪爭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중국 지역 항일 투쟁 |
|---|---|
| 관련인물/단체 | 중국 공산당 동만 특별 위원회(약칭 동만특위) |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30년 8월 1일 |
| 발단 시기/일시 | 1930년 5월 30일 |
| 전개 시기/일시 | 1930년 9월~12월 |
| 발생|시작 장소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
1930년 8~9월부터 이듬해 1월경까지 약 6개월 동안 간도의 연길·화룡·왕청·훈춘현의 조선 농민이 일으킨 여러 차례의 항일 투쟁.
1930년 간도 5·30 봉기 이후 고조된 연변 지역 조선인 항일 투쟁이 ‘8·1 길돈(吉敦) 폭동’을 계기로 한층 무르익어 그 해 9월부터 연말까지 680여 차례의 크고 작은 농민 투쟁으로 발전하였다. 그해 9월 중국 공산당 동만 특별 위원회[약칭 동만특위]가 조직되어 투쟁을 지도한 것도 배경의 하나가 되었다.
1930년 8월 1일 중국 공산당 연변 특별 지부의 주도로 국제 반전 운동 기념일에 맞춰 ‘8·1 길돈 폭동’이 일어났다. 1930년대 연변 지역 최초의 대규모 군중 무장 폭동이었던 길돈 폭동 이후 연변 각지에서는 잇따른 폭동이 일어났다.
9월 들어 연길, 화룡, 왕청 3개 현의 각 촌마다 폭동 위원회나 행동 위원회가 설치되어, 농민들은 “폭동! 폭동! 또 폭동!”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친일파와 악질 지주 등 봉건 세력 타도와 토지 혁명 실현을 추구했다.
10월에는 3개 현의 489명 군중이 한꺼번에 유격전에 참가하여 친일파 33명을 처단하고 지주들의 가옥 29채를 소각하였으며, 지주의 곡식 창고를 열어 빈농과 고농에게 나누어주는 등의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이러한 투쟁은 중국 공산당 연화현 중심위와 뒤이어 발족한 중국 공산당 동만 특별 위원회가 지도하였으며, 토지 혁명 단행과 항일 유격대 및 유격 근거지 창설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사건 발생 지역에서 알 수 있듯이 간도 농민 폭동의 피해자는 거의 다 조선인이었다. ‘8·1 길돈 폭동’ 만으로도 체포된 인원은 139명, 피살자 6명이었다. 또 이후 연변 각지의 폭동으로 투쟁 과정에서 116명의 조선인이 피살되었으며, 일본 군경과 군벌 당국, 간도 총영사관 등에 체포된 조선인 인원이 1,200여 명을 넘었다. 이로써 1930년 한 해에만 2,000명이 넘는 조선인이 검거된 것이다. 또 이른바 ‘제5차 간도 공산당 탄압 사건’의 출발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엄청난 희생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 이후 1930년대에 간도 각지에서는 항일 유격대, 농민 협회, 반제 동맹, 반일회 등의 조직이 결성되었으며, 항일 투쟁에서 중국 공산당의 영향력이 강화되게 되었다. 요컨대 간도 농민 투쟁은 1930년대 만주 항일 무장 투쟁 활성화의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