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만 청년 총동맹

한자 東滿 靑年 總同盟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지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동만 지역의 사회주의계 항일 단체
설립 시기/일시 1928년 1월 13일
해체 시기/일시 1928년 10월
최초 설립지 중국 연변 지역(용정?)
정의

길림성 용정에서 동만 지역 청년 연합 단체 조직의 필요성이 제기되어 1928년 1월에 결성된 항일 청년 연합 운동 단체.

역사적 배경

동만 지역은 재만 한인의 70% 이상이 거주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참의부·정의부··신민부 등 민족주의 운동이 조직 기반을 두지 못했던 곳이었다. 또 1927~1928년경은 국내에서는 신간회 지회 결성 운동, 중국에서는 민족 유일당 결성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시기였다. 동만 지방에서도 민족주의 계통이나 사회주의 계통을 망라하여 항일 운동을 이끌 통일 조직의 결성이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변천

이러한 청년 단체의 통일 조직의 필요성에 따라, 1928년 1월 13일 용정의 동만 청년 총연맹 정기 대회에서 청년 단체의 민족 전선과 통일성 강화를 위해 동만 청년 총동맹이 결성되었다. 동만 청년 총동맹은 조선인 청년 대중의 정치·경제·민족적 이익 획득을 위해 절대 투쟁하자는 강령과 함께 전 민족의 단일당 수립과 식민지 교육 정책 폭로 등의 슬로건을 내세웠다.

1928년 5월부터 만주 전역의 청년 단체는 봉천성 반석현에서 결성된 재중국 한인 청년 동맹에 지부 형식으로 가입해야만 했다. 하지만 동만 지역은 그 특수성을 인정받아 동만 청년 총동맹 역시 ‘특별구’로 인정 받았다. 따라서 비록 청년 단체의 형태를 띠었으나 동만 청년 총동맹은 동만 지역 한인 사회에서 제기되는 여러 문제들을 모두 다룰 수밖에 없었다.

1928년 9월 일제의 간도 총영사관 경찰서에 고려 공산 청년회 만주 총국 회원들이 검거되는 ‘제2차 간도 공산당 탄압 사건’이 일어나자, 뒤이어 10월 동만 청년 총동맹 간부들도 거의 검거되었고 일제 당국은 동만 청년 총동맹을 비롯한 공개 단체들을 모두 해산시켰다.

구성

동만 청년 총동맹 결성 당시 회원은 5,000여 명이었다. 1928년 8월 당시 중앙 집행위원장은 최영근(崔榮根), 중앙 집행위원은 김두용(金斗容)·김하정(金河晶)·김진탁(金振鐸) 등 11명이었다. 또 중앙 검사 위원장은 김옥정(金玉亭), 중앙 검사 위원은 김효종(金曉鍾)·이균(李均), 중앙 상무 서기는 김영호(金英鎬)가 맡았으며, 산하에 문화부·조직부·조사부·소년부·여자부·체육부 등을 두었다.

동만 청년 총동맹은 사실상 동만 지역 한인 사회를 이끌어가는 대표적인 대중 단체였다. 그런데 동만 청년 총동맹의 지도부에는 조선 공산당 및 고려 공산 청년회에 소속된 사람이 13명, 무소속이 9명으로, 사실상 사회주의 계열 특히 ‘ML계’의 영향 아래 있던 조직이었다.

참고문헌
  • 『한국 독립운동사』 4(국사 편찬 위원회, 1968)
  • 독립운동사 편찬 위원회 [편],『독립운동사』5(독립 유공자 사업 기금 운용 위원회, 1973)
  • 김준엽·김창순,『한국 공산주의 운동사』4 (고려 대학교 아세아 문제 연구소, 1974)
  • 신주백, 『만주 지역 한인의 민족 운동사(1920~1945)』(아세아 문화사, 1999)
  • 독립 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소 [편], 『한국 독립운동사 사전』 3-7, 운동·단체편(1-5) (독립 기념관 한국 독립운동사 연구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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