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四道河子 戰鬪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 지역 | 흑룡강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동만 지역 독립군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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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인물/단체 | 지청천|한국 독립군|중국 의용군 길림 구국군 |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933년 4월 15일 |
| 발생|시작 장소 | 흑룡강성 사도하자 |
1933년 4월 15일 한중 연합군이 흑룡강성 사도하자(四道河子)에서 일·만 연합군을 격파한 항일 전투.
1932년 11월 하순 2차 쌍성보(雙城堡) 전투의 패배와 일본의 괴뢰 ‘만주국’ 수립 등으로 곤경에 처한 한국 독립군 지도부의 지청천(池靑天)·김창환(金昌煥)·신숙(申肅) 등은 그해 말 활동의 중심지를 종전의 북만주에서 동포들이 많이 사는 동만주로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동시에 그 지역에서 활동 중이던 중국 의용군인 길림 구국군과 연합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는 방안도 결정하였다. 이에 1933년 1월 13일 수백 명 규모의 한국 독립군과 길림 구국군 제14사는 합작하여 공동 작전을 전개하기로 합의하고 ‘한중 연합 토일군(韓中聯合討日軍)[혹은 한중 토일 연합군, 이하 ‘연합군’으로 약함]’이라는 연합 부대를 결성하였다.
연합군은 그해 2월 10일 참모장 신숙과 참모 김상덕(金尙德)을 남경의 국민당 정부에 특파하여 재정적 후원과 무기·탄약의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연합군은 그해 2월 28~29일 경박호(鏡泊湖) 전투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이와 같은 전과에 힘입어 연합군은 사도하자에 주둔하며 병사 모집과 훈련에 열중하였다. 특히 연변 일대에서 활동하던 원종교(元宗敎) 신도들의 가담으로 군세가 크게 진작되었다.
그러던 중 이를 탐지한 일(日)·만군(滿軍)이 먼저 사도하자를 공격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 연합군은 이 기회에 일·만군을 섬멸할 계획을 세우고 전 군을 4개 부대로 편성하여 치밀한 작전을 펼쳤다.
마침내 4월 15일 일·만군이 1개 사단의 병력으로 황가둔(黃家屯)을 거쳐 이도하(二道河子) 방면을 거쳐 사도하로 진격해오자, 매복해 있던 연합군이 일제히 급습하여 격파하였다.
일·만군의 과반수를 살상하고 연합군의 손실은 극히 적은 대승을 거두었으며, 탄약과 군수품 등 수많은 전리품을 획득하였다. 이후 5월 초 연합군은 주안둔(朱安屯)·황가둔 등지에 남아있던 소규모 일·만군을 여러 차례 기습 공격함으로써 완전히 소탕하였다.
사도하자 전투는 한국 독립군이 동만 지역에서 거둔 두 번째 승전으로서, 독립군 전투의 역사에서도 특기할 만한 대승리로 평가된다. 이로써 6월 7일 동경성(東京城) 전투, 6월 30일 대전자령(大甸子嶺) 전투의 승리가 가능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