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성보 전투

한자 雙城堡 戰鬪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흑룡강성 쌍성보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상세정보
성격 한·중연합군의 만주지역 항일 투쟁
관련인물/단체 지청천|김창환|신숙|한국독립군|길림자위군
발생|시작 시기/일시 1932년 9월 20일
종결 시기/일시 1932년 11월 22일
전개 시기/일시 1932년 11월 17일
발생|시작 장소 중국 흑룡강성 쌍성보
정의

1932년 9월과 11월에 한·중 연합군이 하얼빈 서남방의 흑룡강성 쌍성보(雙城堡)에서 일·만 연합군을 상대로 벌인 항일 투쟁.

역사적 배경

1931년 9월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 각종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 독립군은 북만주 일대에서 중국 의용군과 함께 일본군 및 만주국군과 투쟁하였다. 쌍성보는 흑룡강성의 성도인 하얼빈에 인접한 소도시로서 만주의 물산이 집결되는 요충지였고 친일 부호와 고관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일제 침략의 거점이었다. 따라서 이곳에는 만주국군 초비단(剿匪團)의 주력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다. 이에 한중 연합군은 이곳에서 일·만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다.

경과

쌍성보 전투는 1932년 9월과 11월에 한국 독립당 산하 한국 독립군과 중국 의용군인 길림 자위군이 연합하여 일·만 연합군과 싸운 두 차례의 전투를 말한다. 당시 한국 독립군은 총사령 지청천(池靑天)과 부사령 김창환(金昌煥), 참모장 신숙(申肅)과 각 지대를 포함해 500명여 명의 병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길림 자위군은 수천 명에 달하였다. 당시 쌍성보에 주둔한 일·만군은 3,000여 명 정도였다.

1차 전투는 1932년 9월 20일 밤에 진행되었다. 세 방면을 포위한 한중 연합군은 치열한 공방전 끝에 쌍성보성을 점령하고 많은 군수 물자를 노획하고 약 2,000여 명의 만주국군을 생포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넓은 평지인 쌍성보는 수비가 어려웠으므로 소수의 중국 의용군만 남긴 채 부근의 우가둔(牛家屯)으로 철수하였다. 얼마 뒤 일·만군의 반격으로 쌍성보는 다시 빼앗겼다.

2차 쌍성보 전투는 그해 11월 17일부터 22일까지 5일간 계속되었다. 한중 연합군은 처음에는 쌍성보를 공격해 점령하는 데 성공하여, 성안에 있던 일본군 1개 중대가 거의 전멸하고 만주국군 일부는 투항하였다. 11월 20일 하얼빈 주둔 일·만군이 쌍성보 탈환을 위해 폭격기까지 동원한 대규모 병력으로 반격해왔다. 연합군은 완강히 저항했으나 끝내 물러나고 말았으며, 이후 4일간이나 계속 추격을 당하였다.

결과

쌍성보 전투는 1차 전투에서는 대승했으나 2차 전투에서는 끝내 패전하였다. 패전 후 길림 자위군은 투항하여 겨울을 보내자는 등 크게 동요했다. 한국 독립군 역시 많은 손실을 입었으나 길림 자위군과는 결별하고 새로운 항전의 길을 모색하였다.

참고문헌
  • 신숙, 『나의 一生』(일신사, 1963)
  • 김승학, 『韓國 獨立史』(독립 문화사, 1965)
  • 독립운동사 편찬 위원회,『독립운동사』 5 (독립 유공자 사업 기금 운용 위원회, 1975)
  • 조경한, 『白岡 回顧錄』(한국 종교 협의회, 1979)
  • 독립 기념관 독립운동사 연구소, 『한국 독립운동사 사전』 1-2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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