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東洋 拓植 株式 會社 間島 出張所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용정시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동양 척식 주식 회사의 간도 지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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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립자 | 동양 척식 주식 회사 |
| 설립 시기/일시 | 1922년 |
| 최초 설립지 | 길림성 용정 |
일제의 국책 회사인 동양 척식 주식 회사가 1922년경 길림성 용정 지역에 설치한 출장소.
일제는 1917년 7월 ‘동양 척식 주식 회사법’을 개정하고 10월에는 경성의 본점을 도쿄로 이전하였다. 이렇게 동양 척식 주식 회사의 활동 범위와 사업 영역을 조선 이외로 확장함으로써 한반도를 발판으로 한 대륙 침략과 남방 진출에 동양 척식 주식 회사를 앞세우려 했다.
이에 중국과 남방 각지에 동양 척식 주식 회사 지점들이 설립되기 시작했으며, 이 과정에서 1922년경 용정에서 동양 척식 주식 회사 간도 출장소가 문을 열었다.
1917년 법 개정 이후 동양 척식 주식 회사는 간도 지역에서 활동을 개시하여 그 해에 ‘조선인 구제회’를 설립하였다. 명목상 ‘구제’이나 실제로는 토지 매입이나 고율의 고리 대업 등으로 조선 농민에게 큰 원성을 받았다.
이러한 활동은 1922년경 동양 척식 주식 회사 간도 출장소가 설치된 후로 한층 본격화 하였다. 구제의 명목으로 농민들에게 대부금을 주고 농민들은 그 돈으로 토지를 구매한 후 토지 계약서를 동양 척식 주식 회사에 다시 제출하는 형식이 많았는데, 농민들은 일상적으로 그 고율의 이자에 시달려야 했다. 1928년 당시 신문 기사에서도 토지 자금으로 약 200만원을 융자하는 “동양 척식 주식 회사가 가장 적극적”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동양 척식 주식 회사 간도 출장소는 농민들의 표적이 되어, 1930년 5·30 봉기 당시에는 폭동으로 인한 습격을 받기도 했다. 1930년대에도 동양 척식 주식 회사 간도 출장소는 지역의 친일 기관들과 협력하여 자작농 창정 사업 확대, 집단 촌락 설정 등 각종 사업을 주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