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滿洲 帝國 協和會 |
|---|---|
| 분야 | 역사/근현대 |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 지역 | 길림성 흑룡강성 요령성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만주 지역 친일 소수 민족 연합 관제 단체 |
|---|---|
| 설립자 | 만주국|일본 관동군 |
| 설립 시기/일시 | 1932년 7월 25일 |
| 최초 설립지 | 길림성 신경[현 장춘] |
1932년 3월 1일 건립된 괴뢰 ‘만주국’의 지배 체제를 밑으로부터 받쳐줄 대민(對民) 동원 기구로서 설립되었다. 만주제국 협화회는 지배 이데올로기로서 명목상 ‘민족 협화’를 내걸고 일본인과 친일 세력이 독점한 관료 기구와 지방 농촌을 매개하면서 전 민족을 구성원으로 하는 대중 조직을 구축하고자 했다.
1932년 7월 25일, 만주국 국무원 회의실에서 발회식을 가지고 출범하였다. 만주국의 건국 정신을 실천할 전 만주의 유일한 사상적·교화적·정치적 실천 단체로서, 관동군(關東軍)의 지도와 구상에 의해 설치되었다.
강령은 ① 건국 정신의 현양, ② 민족 협화의 실현, ③ 국민 생활 향상, ④ 선덕 달정(宣德達情)의 철저, ⑤ 국민 동원 완성의 5항목이었다. 이에 입각하여, 만주국 협화회는 정신 공작·협화 공작·후생 공작·선덕 달정 공작·조직 공작·흥아 공작(興亞工作)의 6개 항목을 실천 방책으로 삼았다.
즉 일만 일체(日滿一體)·선만 일여(鮮滿一如)의 달성으로 일제의 ‘동아 블럭’을 완성할 수 있는 기초를 닦아, 만주의 전 주민을 사상적·정치적·사회적으로 통일하고 조직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항일 운동을 탄압할 목적으로 설치된 특설 기구였던 간도 협조회(間島協助會)를 흡수하여 항일 운동 세력에 대한 귀순 공작, 밀정 활동 등을 관장했다. 또한 보갑제(保甲制)를 실시하여 전체 주민을 하나의 조직으로 묶어서 치안에 대해 연대 책임을 지웠다. 이로 인해 가족이나 이웃 사이에 서로 감시하고 고발하는 일이 횡행하게 되었다.
집단 부락 건설도 주요 활동 중 하나였다. 오지의 작은 마을이나 단독 가옥을 철거시키고 주민들은 평야 지대로 강제 이주시켜 감시가 용이한 집단 부락으로 재편성하는 사업이었다.
‘만주국’에서 유일하게 공인된 정치 조직체였으나 정당은 아니었다. 본부 기구는 만주국 황제인 푸이[溥儀]가 명예 회장, 관동군 사령관이 명예 고문, 만주국 총리가 회장을 맡는 등 관제 조직으로서의 성격이 뚜렷했다.
본부 이사 가운데 조선인으로는 관동군 장교 출신으로 만주국 관료가 되었던 윤상필(尹相弼)이 포함되었다. 이밖에 최남선(崔南善), 이범익(李範益), 이선근(李瑄根), 박팔양(朴八陽), 백석(白石) 등도 깊이 관여하였다.
만주제국 협화회 조직은 일반 행정 기구에 맞춰서 중앙 기구와 지방 조직을 갖추었다. 즉 국무원→성 공서(省公署)→현(縣)·기(旗)·시(市) 공서→가(街)·촌(村) 공서로 되는 정부의 관공서 조직에 상응하여, ‘중앙 사무국→지방 사무→판사처(辦事處)→분회’로 되는 집행 기관과 ‘전국 연합 협의회→성 연합 협의회→현·기·시 연합 협의회’로 되는 의결 기관으로 구성되었다.
1940년 6월 현재 조직원은 167만 853명으로, 만주인 141만 8,801명, 일본인 14만 9,369명, 조선인 8만 1,650명, 몽고인 9,924명, 러시아인 3,622명, 기타 7,487명 등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