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羅子溝 士官 學校 |
|---|---|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 |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 나자구진 서대파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무관 학교 |
|---|---|
| 설립자 | 이동휘 |
| 개교 시기/일시 | 1914년 12월 |
| 폐교 시기/일시 | 1916년 말 |
| 이전 시기/일시 | 1917년 1월 |
| 최초 설립지 | 왕청현 나자구 |
이동휘(李東輝)가 주도하여 1914년 북간도 왕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溝) 서대파(西大坡)에 설립한 조선인 군사 정치 학교.
나자구 사관 학교는 조선인의 독립 무장 투쟁을 위해 무장과 사관 등의 군사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나자구 사관 학교는 1914년에 왕청현 나자구 서대파에 설립되었다. 주요 설립자 및 교사로는 이동휘·김립(金立)·오영선(吳永善)·김광은·김영학(金永學)·김하정 등이 있었다. 1914년 이동휘는 군사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연길(延吉) 소영자(小營子)의 길동 학당(吉東學堂)으로 왔다. 다시 일부 뜻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1914년 4월 왕청현 나자구로 갔는데 거기서 이미 반일 활동을 하고 있던 이용익 등의 반일 지사들을 만나 사관학교 설립을 모의하였다. 이로써 소영자길동학당의 교원과 학생들, 나자구 삼도하자에서 온 학생과 교사들을 바탕으로 12월 사관학교가 정식 설립되었다.
얼마 후 나자구의 태흥 서숙 학생들이 편입되었고 또 연변 각지와 조선국내 및 러시아연해주의 학생들까지 모여와 학원생이 무려 300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학교 교장은 이동휘였고, 교사로는 김립·장기영·오영선·김영학·남공선·김하정·고경재·김광은 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당대 유명한 반일 지사들이었다.
학교의 운영 경비로는 구한말의 군부대신이었던 이용익과 원 러시아 주재 이권익 공사의 수만 원에 달하는 지원금이 큰 보탬이 되었다. 그러나 1915년 이동휘가 연해주로 무기를 구입하러 떠났다가 체포되면서 나자구 사관 학교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고 결국 1916년 말에 강제 해산되었다. 그 뒤 학생들 중 일부는 혼춘현 대황구 오지에 들어가 1917년 1월에 양하구·김남구 등과 제휴하여 북일 중학을 창설하였고 일부는 러시아연해주로 들어가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나자구 사관 학교는 일반 사립학교와 달리 군사 지식과 군사 훈련, 반일 민족사상 교육을 주요 내용으로 하였다. 교사들은 대부분 군대에 있던 사람들로 일반 보병들의 조련법 뿐만 아니라 자체로 편찬한 『손자병법』 등 군사 이론을 강의하였고 운동장과 야외에서 제식 훈련·총검술·사격·권투 및 전술 훌련 등을 가르쳤다.
특히 반일 민족사상 교육을 위해 『최신동국사』·『대한역사』·『유년필독』·『월남망국사』 등을 가르쳤다. 이들 교과서들은 조선총독부에서 지정한 금서(禁書)였지만 나자구 사관 학교에서는 비밀리에 사용하였다.
이외에도 나자구 사관 학교에서는 신채호가 편찬한 『이순신전』·『안중근전』 등도 교과서로 사용되었다.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결사의 용기를 북돋아주는 『소년남자가』·『조선독립가』·『대한혼가』·『거국가』·『학생전진가』·『열혈대가』 등의 진보적 가곡 또한 광범히 수집하여 불렀다. 1915년 가을 김광은 등 4명의 학생들은 일본군이 나자구 일대에서 정보를 수립, 지형을 탐사하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들을 즉시 체포, 처단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