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자 | 三一 學校 |
|---|---|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교육/교육 |
| 유형 | 기관 단체/학교 |
| 지역 |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시 대황구 |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 성격 | 학교 |
|---|---|
| 설립자 | 김근(金槿)|김성도 등 |
| 개교 시기/일시 | 1923년 3월 1일 |
| 폐교 시기/일시 | 1929년 9월 |
| 최초 설립지 | 훈춘현 대황구 |
1923년 북간도 훈춘현 대황구에서 조선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사회주의 교육 실시를 위해 설치한 학교.
삼일 학교의 교육 목표는 소련의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상을 새 세대 청년들에게 전수하기 위한 것이다. 민족주의 사상을 배격하고 마르크스 주의를 학습하여 공산주의 사상으로 새 세대를 교육하는 것을 취지로 하였다.
삼일 학교는 1923년 3월 1일에 훈춘 대황구에 설립되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훈춘에도 중국혁명의 조류가 파급되고 소련 연해주로부터 러시아 10월 혁명의 영향이 직접 미쳐 마르크스 주의가 전파되어 왔다.
그 때 북일중학교를 졸업한 뒤 소련에 가서 마르크스 주의를 학습한 김근이 대황구에 돌아왔다. 귀향한 뒤 혁명 활동에 종사한 김근은 공산주의 사상으로 새 일대의 청년들을 육성하기 위해 김성도·이상준·유사준·엄승호·김경련·김규봉 등과 상의한 끝에 근대 학교를 꾸리는 사업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1923년 3월 1일 대황구에 삼일 학교가 세워졌다. 학교 창립자들은 마르크스 주의를 학습하고 민족주의를 배격하고 공산주의 사상으로 새 세대를 교육하는 것을 취지로 정하고 개교일을 기념하여 교명을 삼일 학교라 정했다.
삼일 학교의 학생들은 대황구 지역을 중심으로 경신·반석·일송정·연통라자·인화동·너터재 등지에서 통학하였다. 학생 기숙사가 부족하여 현지 주민들의 집에 하숙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1928년에 전교 학생은 무려 100명이었다.
훈춘일본 영사관은 자라나는 혁명 역량을 압살하고자 유순대를 부추겨 삼일 학교를 파괴하였고, 결국 1929년 9월 학교는 문을 닫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삼일 학교는 중학부와 초등부를 두었고 초등부에는 학년까지 두었는데 북구와 청수동에 분교가 있었다. 중학부에는 보습과와 고등과가 설치되었다. 보습반에는 소학교 5, 6학년 과목을 배우고 고등과에서는 중학교 1, 2학년 과목을 배웠다. 고등과를 마친 학생들은 용정의 대성, 은진 등 중학교에 가서 시험을 치고 3학년에 편입하였다.
삼일 학교는 초등부의 교과목은 조선어·수학·역사·지리·음악·체육이고, 고등과에서는 초등부 교과목 외에 물리·화학·영어·일본어 과목을 개설하였다. 그리고 성경과도 있었는데 실제 성경의 내용을 다룬 것이 아니라 김성도와 최두찬 등이 마르크스주의 기본 이론을 강의하였다.
1928년 무렵 삼일 학교에는 공산청년회 조직이 나오고 아동단 활동도 활기를 띠었다. 이밖에 학생 친목회라는 대중적인 학생조직이 있었는데 그 중견들은 공산청년회단원들이었다. 학생친목회에는 주 1회씩 강연회를 열었는데 매번 몇몇의 학생들이 강연을 하였고 토요일 오후에는 변론 모임도 가졌다. 해마다 3.8절·5.1 노동절·10월 혁명절 기념 활동을 진행하여 학생들의 시야를 넓혀주고 혁명의 도리를 깨닫게 하였으며 항일 투쟁에 참가하고 공산주의를 위하여 싸울 신심을 북돋아 주었다.
삼일 학교의 문예 활동도 다채로웠다. 그들은 「십진가」·「여성해방가」·「아동단가」 등 혁명 가요를 널리 불렀다. 1928년 봄에는 춘기 여행을 한다는 명의로 현 내 여러 곳에 가서 순회 공연을 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관람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삼일 학교의 경비는 학교 유지회라는 학부형 조직이 매년 각호에서 25-30원씩 내는 것으로 충당되었다. 삼일 학교의 졸업생 가운데는 훈춘현의 당조직과 항일 유격대의 중견으로 된 사람들이 많았는데 김근·안길·김규봉·김원익 등은 동만항일 투쟁에서 빛나는 업적을 쌓았다.
삼일 학교는 1923년 3월에 창립되어 1929년 9월까지 다만 6년밖에 운영되지 못했지만, 그 사이에 많은 혁명인재들을 육성하였기에 혁명의 요람으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